경직되다 못해 어떤 것에도 놀라워하며 감동할 줄 모르고 모든 것이 그저 그런 날이 오면, 인생은 되풀이의 연속이 된다. 유배의 시간이다. 메마른 삶의 시간, 죽어버린 영혼의 시간이다. 소생하기 위해서는 은총, 자기 망각, 또는 조국이 필요하다. 어느 아침, 길모퉁이를 돌면 감미로운 이슬 한 방울이 심장에 떨어졌다가 증발한다. 하지만 아직 신선함은 남는다. 심장이 요구하는 건 언제나, 그 신선함이다. 나는 다시 떠나야만 했다.
<결혼, 여름> 중
창가에 앉아 무심코 창밖을 바라본다. 햇빛이 유리창을 타고 흐르다 나뭇잎 위에 내려앉고, 바람이 그것을 살짝 흔들어 반짝이는 순간. 특별할 것 없는 아침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것은 바로 이런 감각이 아닐까. 카뮈가 말한 '유배의 시간'이란 감동할 줄 모르는 상태, 모든 것이 그저 그렇고, 무채색의 반복 속에서 무감각해지는 순간들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감동이 없는 삶은 결국 생명력이 없는 삶이다. 하지만 신선한 바람 한 줄기, 우연히 들린 음악 한 소절, 온몸의 감각을 일깨우는 온기나 한기, 낯선 곳에서 마주친 사람의 미소 같은 사소한 것들이 다시 흔들어 깨운다. 감동이란 결국 우리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무뎌짐과 유배의 시간
삶이 반복될수록 점점 익숙함 속에 안주한다. 익숙한 장소, 익숙한 사람, 익숙한 감점. 어떻게 생각하면 새로운 일이 없고 예측 가능한 삶의 패턴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익숙한 것들에 머물다 보면 감각을 잃고, 감정을 잃고, 결국에는 삶 자체를 잃어버릴 수 있는 것 같다. 무뎌진다는 것은 보호막이 생긴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삶의 본질과 멀어지게 만든다.
카뮈는 이런 상태를 '유배'라고 표현했다. 감동할 줄 모르고, 감각할 줄 모르는 그저 그런 상태. 살아가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시간. 이런 시간을 깨우기 위해서는 은총, 자기 망각, 조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은총은 삶이 우연히 던져주는 선물 같은 순간이다. 길을 걷다가 마주하는 아름다운 눈의 결정, 길 가에에서 흔들리는 푸른 풀잎과 형형색색의 꽃, 노을이 물드는 하늘, 잊고 있던 노래가 카페에서 갑자기 흘러나올 때의 설렘, 기대하지 않았던 배려심. 의도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신선한 순간들이다. 문제는, 그런 순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법이다. 내 감각들은 세상에 대하여 열려 있을까. 닫혀 있거나, 아주 작은 입구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닐까.
다시 떠나기
때로는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한다. '자기 망각'이란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를 내려놓는 것이다. 낯선 곳에 가거나 새로운 경험을 할 때 자연스럽게 감각은 열릴 수 있다. 여행이 주는 해방감. 처음 걸어보는 거리, 처음 듣는 언어, 처음 맛보는 음식 앞에서 자연스럽게 감탄하고 감동한다. 익숙한 세계의 틀을 벗어날 때 새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꼭 먼 곳으로 떠나야만 할까. 일상의 틀 안에서도 감각을 깨우는 연습은 가능하지 않을까.
삶이 메말랐다고 느껴질 때, 감동할 줄 모르는 내가 낯설 때, 다시 떠나보자. 꼭 물리적인 여행이 아니라도 좋다. 새로운 취미를 가져보거나, 다른 시각으로 일상을 바라보거나, 잊고 지낸 책을 꺼내 읽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낯설게 보기다. 익숙한 길을 걸을 때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풍경과 이해가 펼쳐질 것이다. 왜 그동안 놓치고 있었을까 싶을 만큼의 황홀한 것들.
어느 아침, 길모퉁이를 돌다가 감미로운 이슬 한 방울이 심장에 떨어지는 순간. 그 순산을 알아채고 멈춰서서 그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면, 어쩌면 다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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