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는 삶의 마지막 기록이다. 생의 끝자락에서 남기는 말이니만큼 진실로만 가득할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역설적이게도 마지막 순간까지 거짓을 남기는 것 같다. “행복했다.”, “후회 없이 살았다.”, “모두 사랑했다.” 삶을 돌아보면서 흔하게 적게 되는 말이다. 정말로 그것만이 진실일까.
사람은 종종 자신의 원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떠나는 순간에도 남겨진 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유서 속에는 사실과 다른 감정이 담길 수 있다. 미련이 가득한 삶도 깔끔한 마침표로 정리되며, 끝까지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조차 “괜찮다”고 적는다.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을 날리고, 최대한 긍정적이고 행복했던 기억들을 찾아본다.
어쩌면 유서야말로 가장 많은 거짓말이 담긴 글일지도 모르겠다. 진실을 쓰고 싶어도 차마 적을 수 없는 말들이 있고, 남겨질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어 꾸며진 문장들이 있다. 무엇을 위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거짓을 남기게 되는 것일까.
거짓말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필연적으로 반복된다. 타인을 속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스스로를 속인다. 감정을 숨기고, 약함을 감추고, 불안을 눌러 담으며 살아간다. 그런 습관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것 같다. “나는 행복했다.”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굳이 행복했다고 쓸 필요가 있을까. “나는 후회 없이 살았다.” 정말? 후회가 없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납득시키려는 말이 필요했을까. 삶이 만족스러웠다고 믿고 싶고, 모든 감정을 정리하고 떠나고 싶다. 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아쉽고, 미안하고, 원망스럽고, 안타까운 것들. 이 감정들이 남은 상태로 떠나기에는 버겁기에 마지막 문장에 거짓을 보탠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유서는 단순한 고백이나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남는 것 같다. 죽음을 앞두고도 말의 무게를 고민하며, 남은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문장을 선택한다. 원망과 분노를 유서에 담으면 죽음조차 씁쓸해질 것 같아,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지막까지 후회와 상처를 주고 싶지 않기에 차라리 아름다운 마무리를 선택한다. “나는 후회 없이 행복했다”고 적는다면 남은 가족들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반면 “너무 힘들었고, 괴로웠다.”고 적는다면 남겨진 이들은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
미화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진실보다 거짓이 더 필요한 순간도 있다. 마지막 순간에 선택하는 말은 단순한 진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감정을 남길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기도 하다. 결국 유서 속 거짓말은 남겨진 자들을 위한, 그리고 어쩌면 자기 자신을 위한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유서를 남길 때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까. 모든 감정과 경험들을 가감 없이 적을 수 있을까. 유서에도 거짓말이 섞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마지막까지 사랑받고 싶어 하고, 마지막까지 위로하고 싶어 하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정리하고 싶어 한다.
지금 당장 죽음에 닥치지 않았기 때문에 유서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죽음에 직면하더라도 제대로 쓸 수 없을 것 같다. 애초에 ‘제대로’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겠지만, 유서를 의미 있게 보는 사람들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에 굳이 슬픔을 넘겨주고 싶지 않다. 그건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냥 자연의 일부로 편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정리하고 싶은 마음. 마지막 순간에 후회에 가득 잠겨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에. 분명 후회도 있겠지만 행복한 기억들도 많을 것이고, 감각할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면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웃으면서 마무리하고 싶기 때문에.
마지막까지도 솔직해질 수 없다면, 애초에 솔직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살아 있는 동안에 더 진실하게 살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남길 말을 미리 생각하고,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용기 내어 전할 수 있다면 굳이 유서에서 거짓을 보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거짓 없는 유서를 쓰기 위해 지금 얼마나 솔직한 삶을 살고 있을까. 진심을 표현하는 것, 하고 싶은 말을 미루지 않는 것, 삶의 순간순간을 충분히 살아내는 것. 이러한 삶의 태도가 거짓 없는 유서를 남기는, 아니 유서가 필요하지도 않은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행복했다”가 아니라 “행복하다”가 쌓여가고 공유되는 것.
사람은 언젠가는 떠날 것이고, 그때 누군가는 마지막 말을 들을 것이다. 그 문장이 미화된 마무리가 될지, 담담한 진실이 될지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정말 떠날 때는 굳이 아무런 말을 건네지 않아도 웃으면서 서로 인사할 수 있는, 유서가 필요 없는 그런 삶을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가 없는 삶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지속적으로 유한한 시간을 의식에 두는 것과 아닌 것은 떠나갈 때 마음의 무게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헤어질 시간이 왔다면 “간다”, “응, 잘 가” 이 한마디의 주고받음으로 충분하면 좋겠다. 만약 주고받지 못할 상황이라면 그저 담담히 “먼저 갔구나”, 속으로 한 존재를 떠올려 볼 수 있을 정도면 좋겠다. 그러다 살아 있는 의식 속에서 문득문득 떠올라 어두울 때 밝혀줄 수 있는 기억으로 잠깐씩 살아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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