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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나/365 나에게 접속

1일1주저리. 사람은 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by 점점이녕 2024. 7. 16.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 뭐 늘 그렇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여러주제에 대해서 쓰고 지웠다. 1일1주저리를 다시 시작한지 10일 정도가 된 것 같다. 오랜만에 3일 연속 사무실 출근을 하느라 일찍 일어나야했고, 일이 많아서 개인적인 시간 갖기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루틴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으니 적당한 숙면은 취해야했고. 사실 적당하지 않고 부족한 편이었다.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서 시간을 알차게 썼어야하는데 그 압박감에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집중력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그렇게 집중되지 않는 상태에서 또 의미있는 글을 적으려고 하다보니 글자는 또 산으로 기어올라갔다. 아니, 오르지 않았다. 그냥 산을 타고 여러 물줄기로 흘러래녀왔던 것 같다. 목적이 없이.

 

어제 잠깐 썼던 글이 있어서 조금 보충해서 오늘의 1일1주저리를 마무리할까 했는데, 매일 생각하자는 목적에 어긋났다. 양심에 찔려서 포기하고 다른 주제를 찾았다.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으니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적어보기로 했다. <홍학의 자리>와 <솔라리스>를 병렬로 독서하고 있었다. 둘 다 아직 초반의 스토리라 전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적지는 못하고, 그래도 읽은 데까지라도 느낀점을 적어보기로 했다.

 

홍학의 자리는 원조교제를 하고 있는 마흔 살 선생에 관한 이야기다. 자기 반 고등학교 여학생과 불건전한 관계를 맺다가 여학생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탄로날 두려움에 시체를 유기한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내 학생을 누가, 왜 죽였는지 화내는 것이 매우 역겹고 더러웠다. 자신은 피해받지 않기 위하여 깨끗하게 삶을 정리할 수도 있었던 시신을 호수에 유기하면서 퉁퉁 불어터져 누군지도 모르는 존재로 만들었다. 학생의 외로움과 고통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죽고 나서도 차가운 물 속에 외롭게 유기했다. 추악한 인간상을 접하니 놀라운 반전이 아니라면 기분 더러운 책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스토리에 대해서 적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나이차이가 심하게 날 경우 사회적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 나이는 인생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자주 이야기하지만 만남에 있어서는 중요한 것 같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그런 인식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 사람들을 잘 모르지만 도대체 왜 만나고 있는지 의문이 들고, 나이든 사람이 개념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나이 차이가 크니 서로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 달라 대화도 통하지 않을 것이고, 한 쪽의 육체가 너무 늙어버려서 같이 활동하기도 어려울 것이고, 이런 저런 다양한 이유를 생각해보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나이대가 비슷하다고 말이 잘 통하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평균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평균을 벗어나는 사랑을 하겠다는 사람들을, 나는 그들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부적절하게 생각을 할까.

 

<나의 아저씨>는 남성 판타지라는 스토리로 꽤 비난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제목 부터가 거부감이 들었고, 이미지로 본 장면에서는 확실히 젊은 여성과 나이든 남성이 나왔다. 반면 <도깨비>는 몇백 살이 차이나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드라마로 회자되며, 도깨비의 멋짐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나이 차이는 후자가 훨씬 강함에도 왜 전자는 욕을 먹고, 후자는 그렇지 않을까. 간단히 생각해 보았을 때는 현실감의 차이인 것 같기도 하다. 분명 어디에선가 접했던 삶과 500년 먹은 도깨비의 삶은 받아들이는 거리감이 다르다. 도깨비의 나이는 상관이 없다. 그저 멋진 얼굴과 멋진 몸매가 중요하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인간이 얼마나 시각적으로 취약한 존재인지도 알게 된다.

 

도깨비가 만약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많이 나오고, 키도 작고, 안경도 쓰고 있었다면 사람들은 열광했을까. 몸에 칼이 박혀서 칼을 빼 줄 운명의 사람을 찾고 있다는 동일한 이야기라고 해도, 그 이야기와 감정선에 몰입할 수 있을까. 분명 아니다. 사실 실제로 나이가 많아서 불쾌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많아 보여서' 불쾌감이 드는 것 같다. 만약 앞으로 살 날이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20대지만 80대의 외견과 육체를 지닌 사람과 80대지만 20대의 외견과 육체를 지는 사람 중 한 사람을 택해야한다면 거의 후자를 택할 것 같다. 여기는 보여지는 것이 너무 중요한 세상이기 때문에.

 

얼마 전에 사람은 나이가 들고 그 시간의 축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어서 가치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부족하지만 나이듬을 멋지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니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외견과 숫자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시각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느끼니 답답함이 있다. 사람은 보여지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블라인드>에서는 눈이 먼 남자를 위해 가정부가 상주하여 그에게 다양한 감각을 가르친다. 여자는 평생을 못생겼다며 핍박을 받아왔고, 자신을 보지 못하는 남자에게 위안을 얻는다. 남자는 자신에게 세상을 알려준 여자를 사랑했고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그들은 함께 였다. 운이 좋게 남자는 눈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남자가 눈을 뜬 날 여자는 남자의 겉을 떠났다. 처음으로 본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도 잃었다.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삶은 그래서 괴로웠다. 남자는 여자의 하얀 머리칼 같은 고드름으로 두 눈을 찔렀다. 눈을 뜨고 단 한 번도 갖지 못했던 미소가 얼굴에 걸렸다. 여자가 돌아올 것을 알았다.

 

본질과 알맹이, 마음, 정신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눈으로, 귀로, 피부로 들어오는 감각을 무시한다면 그 이면의 본질을 느낄 수 있을까. 여전히 잘 모르겠다. 통 속의 뇌가 되고 싶지는 않다. 모든 것을 없애야만 얻을 수 있는 진리는 삶에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그냥 부족하더라도 오감을 가지고 살고 싶다. 나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저 보여지는 것에서 불쾌와 이상을 느끼기도, 잘  보이고 싶어서 압박감을 받기도 한다. 지금 쓰는 글도 그렇다. 욕을 먹을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봐 자기 검열을 한다. 나쁜 생각은 숨기고 겉으로  드러낼 때는 그럴듯한 생각으로 포장한다. 위선이다. 사람 좋아 보이고, 논리적이고, 이해심이 있고, 공감능력도 있고. 온갖 좋은 것들은  다 갖추고 싶고 보여주고 싶었지만 고작 나이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에 대해서 반론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문제 삼았던 사람들과 사회 현상 속에 나도 들어가 있었음을 느낀다. 그래도 감각에 너무 취약하고 비합리적인 생각도 자주 하지만, 이렇게 의식적으로 정말 그 생각이 맞는지 떠올려보는 것으로라도 노력을 해보자. 나는 신도 아니니 모기와 강아지를 똑같은 생명으로 대할 수도 없고, 당연히 살아있는 동안은 건강히 살다가고 싶고, 좋아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싶고, 잘 보이고 싶다. 다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는 주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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