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야나/365 나에게 접속

1일1주저리. 되고 싶은 인간상

by 점점이녕 2024. 7. 13.

오늘은 글쓰기 모임에서 적은 글로 1일1주저리 포스팅 완료!

주제는 '되고 싶은 인간상'이었다. 아무래도 최근에 여러 번 생각하고 적어본 글이라서 거의 비슷한 생각들과 사례로 취합을 했던 것 같다. 새롭게 적어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원하는 인간상이 계속 바뀌는 것도 이상하니까 그냥 적었다. 사실 새로운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적은 글의 내용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다른 분들의 글과 피드백을 들으면서 새로운 경험을 했으니 매우매우 만족! 내 글 자체의 만족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형식의 생생한 이야기도 듣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경험을 해서 만족한다.

 


 

태생이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 미래에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꽤 많은 고민을 해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마다 명확한 모습을 그리지는 못하고 다소 뜬구름만 잡았다. 최근 글쓰기 모임에서는 ‘나의 이상적인 60대의 삶’이라는 주제로 살아온 삶보다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도 그려보았다. 좋은 집, 화목한 가정, 여유로운 경제 수준, 여전히 건강한 육체, 사회적인 인정, 마음이 맞는 주변 사람들의 존재 등. 목표로 했던 것을 모두 이룬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보았다. 처음에는 많은 것을 이룬 미래를 생각하니 지금부터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보람을 느꼈지만 뭔가 찝찝했다. 동기부여는 잠깐이었고 불안감은 길었다. 계속 고민하다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문서를 다시 생성했다. 백지에서 다시 시작하자.

 

무엇이 그렇게 걸렸을까 고민을 했다. 아무래도 이 많은 것들을 다 이루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었던 것 같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이니까. 크게 실망하지 않기 위하여 기대를 낮추는 습관이 작동한 것 같았다. 물론 인생의 목표와 북극성은 중요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추구한다면 못 이룰 것도 없겠지만 인간사라는 것이 항상 의도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추구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건 잘못된 삶인 것일까 걱정을 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건강한 삶을 바랬는데, 의도치 않게 병에 걸린다고 실패한 삶이 되어버리면 안되니까. 어떤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 내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루고 싶은 것들을 다 포기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물질 세계에서 사회적인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과 자산도 중요하고, 인간관계도 중요한 것은 당연하니까. 하지만 그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넘어서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가치가 훨씬 중요할 것 같았다.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죽을지를 고민해보는 것도 방법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과연 죽음이 닥쳤을 때 어떻게 살았어야 후회하지 않을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후회를 하지 않는 삶은 불가능할 것 같고, 적어도 ‘덜’ 후회를 하고 싶다. 비록 원하지 않는 상황에 처하거나 슬픔과 고통을 겪더라도 묵묵하게 이겨낼 수 있었으면 좋겠고, 나만 생각하기 보다 배우고 성취한 것을 공유하여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주변 환경과 사건 사고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추구하며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이라면 시간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나이라는 숫자가 올라가더라도 내가 노력으로 성취하지 않은 것들로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몸이 아프고 병이 들더라도 그 자체가 사람이기 때문에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태도였다.

 

“선생님, 여기는 어떻게 가나요?” 대학생 때 지하철을 타러가는 와중에 어떤 할아버지가 길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누가봐도 나이차가 확실히 나 보이는 상황에서 어떤 할아버지는 처음보는 젊은 사람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길을 알려주고 헤어짐은 30초 정도로 짧았지만 이 기억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아마도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순간에는 왜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할아버지는 본인이 누군가에게 답을 구하는 상황에서의 예의를 보여주신 거였고, 거기서 나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대우를 받고 싶어하거나 어린 사람을 막 대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성숙한 사람도 분명 있었다. 나는 그런 성숙한 태도를 지닌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러다가 나이 차이가 명확히 나는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에게 바로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존댓말로 질문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봤지만 아니었다. 반말로 물어봤을 것이 분명해서 조금 더 표면적인 것에 너무 신경쓰지 않도록 노력하자고 다짐했던 것 같다.

 

최근에 심심해서 귀멸이 칼날을 다시 본 적이 있다. 거기서 염주는 이런 말을 했다.

“노쇠하는 것도, 죽는 것도, 인간이라는 덧없는 생물이 지닌 아름다움이다. 노쇠하기에 비로소, 죽기에 비로소,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고도 고귀한 것이지. 강하다는 것은 비단 육체만을 가리켜 쓰는 말이 아니다.”

 

나이 듦에 대해 늙은이, 틀딱, 딸피 등 모욕과 비하를 서슴지 않는 세태에서 오히려 인간은 나이가 들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표현한 것이 인상 깊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에서도 우리보다 더 빨리 인생의 참된 지혜를 얻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현자들’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읽고 듣고 나누어야 할 진정한 멘토이자 스승, 인생 선배라고. 사실 노인 분들에 대해서 거동을 잘 못하고 일할 기회가 줄어주는 것들에 대해 안타깝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창피해졌다. 같은 세상을 살아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서 누군가는 쇠퇴해져 가고, 누군가는 성숙해져 가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해서 기회와 가치를 잃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경험을 쌓고 나눌 수 있는 성숙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