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아이들이나 손주들 세대의 미국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갖고 있다. 미국은 서비스와 정보 경제(산업)에 있을 것이고, 주요 제조업의 대부분이 다른 나라로 넘어갔을 것이고, 뛰어난 기술의 힘은 극소수의 손에 넘어간 상태에서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이해하지도 못하게 되고, 대중은 자신의 어젠다를 설정하거나 힘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지식에 기반한 의문조차 제기할 능력을 잃게 되고, 점을 치거나 불안한 마음에 별자리를 알아보면서 우리의 비판적 사고능력이 쇠퇴하고, 자신의 기분에 좋은 것과 진실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눈치도 채지 못하는 상태에서 미신과 미개한 시대로 되돌아갈 것 같은 예감이다. 미국인들이 단순해지고(dumbing down, 복잡한 지식과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있음은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미디어에 등장하는 의미 있는 콘텐츠가 서서히 쇠퇴하는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30초짜리 (지금은 10초 이하로 줄어들었다) 사운드바이트, 가장 단순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램, 유사과학과 미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무지에 대한 찬양(celebration of ignorance)이 그렇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로 유명한 천문학자다. 한참 제대로된 독서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을 검색한 적이 있었고 <코스모스>는 거의 빠지지 않고 추천된 책이었다. 서점에서 본 책은 일반적인 책 2-3권 정도는 합쳐놓은 것과 같은 두께여서 읽기도 전에 그 분량에 압도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은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구매했다. 그게 몇년 전이고 사실 아직도 읽지 않았다. 몇 페이지 정도는 읽었지만 언제 포기했는지도 잘 기억나질 않는다. 천문학자이기에 우주에만 몰입한 분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환경과 인간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는 부분에서 기본적인 통찰력을 갖추신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이나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이 점점 무지해져 간다는 부분은 경각심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고전은 시대가 변했음에도 우리에게 많은 지혜를 전달해주고 문제를 상기시켜준다. 현대 사회에 적용해도 아무런 이질감이 없다. 사회적인 제약은 컸지만, 인터넷과 빠른 교통 수단도 없었으며, 다양한 사람들이나 양질의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그 당시의 산물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며 깨달음을 주는 것 같다. 지금을 겪지 않은 세대에서 어떻게 지금의 문제를 정확히 꼬집을 수 있는지 신기했지만, 그 말은 즉슨 인간은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으며 표면적으로는 달리보여도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 같다.
만약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지적 수준을 높이고 사회를 발전시켰다면 우리는 고전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지금 사람들의 사고와 생활 방식이 훨씬 뛰어나다면 과거를 돌이켜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과거를 탐험하는 것은 시간의 축적에 걸맞는 지적 발전은 이룩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역행까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발전은 커녕 퇴보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요새는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고, 진실과 본질이 중요하기 보다는 그저 보고 싶은 것은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경우가 많아졌다. 스마트폰과 PC만 켜도 좋은 콘텐츠들은 너무 많다. 생각하지 않아도 휘황찬란한 영상과 음악, 목소리로 유익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거에는 생각하지 않으면 배울 수 없었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않아도 눈과 귀로 많은 것들을 넣어준다.
나도 과거에 비하여 글을 읽기가 확실히 힘들어진 것 같다. 오랜만에 독서를 하려고 하니 집중이 되질 않았고, 한 페이지를 읽으면 뒷 페이지의 내용을 까먹었다. 책을 다 읽어도 어떤 내용인지 요약을 하거나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가장 집중이 잘 됐던 때는 대학생 때였는데, 그 시기에는 두꺼운 책도 무리없이 술술 읽고 심지어 재미를 느꼈지만 요즘은 억지로 읽는 편이다. 배워야하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 멍청해질 것 같다는 걱정 때문에. 그러나 나는 과연 멍청에서 벗어날 정도의 지적인 노력을 한 것이 맞을까.
칼 세이건이 지적했듯이 지금 편하게 사용하고 있는 도구와 기술에 매커니즘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몇개나 될까. 요새는 AI를 사용하지 않으면 뒤쳐질 것 같아서 GPT, 미드저니, Suno ai 등 많은 서비스를 이용해 보았지만 사실 LLM이나 딥러닝 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본질적인 작동 방식을 배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입력창에 프롬프트만 적어도 결과가 잘 나오니까 써본 것 자체로도 잘 이용한 것이 아니겠냐는 합리화를 했다.
그것 뿐만일까. 다양한 콘텐츠를 보면서 새로운 삶도 접하며 사고를 확장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며 원문을 읽기 보다는 요약해서 보기 일쑤였다. 2시간 짜리 영화도 너무 길게 느껴져서 유튜브도 15분 정도 요약되어 있는 것을 보았고, GPT를 통해서 고전 문학의 줄거리를 요약해서 봤다. 안 본 것 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걱정이 됐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대충 보면 대충 알게 되고, 본질에서 벗어나 잘못 안게 되는 것은 아닐까. 껍데기만 봤으면서 알맹이까지 봤다고 착각을 하고 잘못된 정보를 진실인 것처럼 내뱉지는 않을까.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고 했는데, 애매한 지식이 어쩌면 무식의 신념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칼 세이건이 말했던 '무지에 대한 찬양'이 사실 이런 부분이 아니었을까 걱정됐다.
유튜브를 보다 보면 쓸데없이 싸우는 댓글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주제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별 것도 아닌 일에 내 말이 맞다느니 네 말은 틀리다느니, 논리가 아닌 무조건적인 비방과 욕설이 판을 친다. 사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닌 것 같다. 그저 누군가를 깎아 내리고 상대를 포기하게 만들어 단순히 말싸움 자체에서 이겼다는 자기 만족이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 꼰대고 오지랖이 된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 기분이 나쁜 것이 중요하다. 기분이 좋고 헛된 우월감이라도 느끼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발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 아닐까. 성별이 다르다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유명한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고, 종교가 다르다고, 어떻게 해서든 집단을 나누어 타집단을 폄하하는 경우는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때로는 인간성까지 상실한 생각까지. 솔직히 얼마나 개인적으로 잘난 것이 없으면 거대 집단을 자기와 동일시해서 만족감을 느낄까 싶기는 하다.
여튼 온라인을 통하여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오히려 지금의 세태를 보면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세우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비난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다름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등급을 매기게 되었꼬, 끊임없이 비교하고 눈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옳고 그름의 딱지를 붙이고 있다. 기준은 높아졌고 기준에 미치지 못한 삶은 부족하고 나쁜 삶이 되어버린 것 같다. 다른 사람의 고통보다 내 손가락의 거스러미가 더 아픈 법이라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졌으며 내 기분은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 된 것 같다. 기술과 과학의 발전은 삶은 윤택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궁핍하게 만든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온라인 세상이 사회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나도 표면적인 문제를 보면서 큰 문제로 착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나도 생각해보면 어릴 적에는 TV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를 보면 너무 무섭도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또 사람이 죽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죽음에 무감각해졌다. 물론 그게 내 주변의 이야기라면 다르겠지만.
세이건의 불길한 예감은 사실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가만히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점점 더 가볍도 편한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 같지만 익숙해지면 안될 것 같은 경각심이 들었다. 기술의 발전을 다 파괴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분명 많은 기술들고 소통을 쉽게 할 수 있게 되었고,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콘텐츠를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생산성도 높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닌 사람이다. 같은 도구여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을 향상 시킬 수도 있고, 퇴보 시킬 수도 있다. 당연히 나는 성장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것이다. 휴튼에서는 물었다.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느냐고.
독서의 중요성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독서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막상 책을 읽고 나면 내용을 요약할 수 없었다. 뭔가 느껴지고 떠오르기는 하는데 언어로 나오지 않았다. 목적이 없었고, 교훈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책의 문제가 아니라 내 머리의 문제였다. 그래서 ‘독서’가 아니라 ‘독서와 사고하기’로 목표를 바꾸었다. 그냥 읽기 보다는, 내 생각을 반드시 기록하기로. 그리고 글쓰기를 꾸준히 하고 있는 것도 멍청해지지 않기 위한 방법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회사에서도 다양한 일을 하며 배우는 것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회의감이 생겼다. 이렇게 평생 회사와 집을 반복하면서 삶을 다 하는 것이 맞는지. 삶에 내가 없었다. 그 때는 홀로서기라는 목표를 잡았다. 주변 환경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역량을 기르자고. 그 이후에는 ‘내’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록하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체적으로 살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챌린지도 도전하고, 이렇게 매일 뉴스레터를 읽고 세상을 파악하는 것, 새로운 정보를 기반으로 생각을 적어보는 것, 요리를 해보고 맛을 느끼는 것, 원데이클래스를 통하여 다양한 취미 생활을 접해보는 것, 아침과 저녁에 내 하루를 돌아보는 것 등. 엄청나게 유익하고 지적으로 살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하건대 과거의 나보다는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들었다.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고는 있지만 과거랑 똑같다고 말한다면 그동안 해온 노력과 수고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변한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예측하건데 부족함은 사실 영원히 채워지지는 않을 것 같다. 인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지식과 경험들이 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노력을 하더라도 내가 해본 것은 해보지 않은 것의 발 끝에도 못 미칠 것이다. 그건 진실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에 통달하는 신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는 인지 하면서 적어도 멍청해지지 않기 위한 노력은 지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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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사운드바이트(soundbite)가 복잡한 지식과 뉘앙스 있는 토론을 대체하고 대중의 비판적 사고능력이 쇠퇴하는 것은 물론, 그 결과로 사람들이 미신과 점성술, 유사 과학을 믿게 될 것 같다는 그의 우려는 사실이 되었다. 사람들은 긴 기사를 읽는 대신 트위터의 140자만으로 자신의 견해를 결정하고 분노했고, TV에 나와서 유사 의학을 퍼뜨리며 유명해진 인물은 상원의원 출마를 선언했다.
점점 더 단순해지는 미디어를 보면서 대중이 어리석어질 것을 걱정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그게 무지에 대한 찬양, 그리고 미신과 유사과학에 대한 신뢰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 것은 감탄스럽다. 세이건이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 가능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말처럼 "천문학을 공부하면 겸손해지고" 인류의 역사가, 인류가 만들어낸 진보가 사실은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 아니었을까?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 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 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인류 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작은 픽셀의 한쪽 구석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는 만행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창백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구는 생명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우리 인류가 이주를 할 수 있는 행성은 없습니다. 잠깐 방문을 할 수 있는 행성은 있겠지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좋든 싫든 인류는 당분간 지구에서 버텨야 합니다. 천문학을 공부하면 겸손해지고, 인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인류가 느끼는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멀리서 보여주는 이 사진입니다. 제게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를 더 배려해야 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인 저 창백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강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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