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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나

만드는 이의 행복

by 점점이녕 2022. 5. 25.

'만드는 사람의 행복'... 계속 생각나는 것을 보니 살짝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일을 하면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지금 다니는 회사도 분기마다 성과 리뷰를 하는데, 업무는 물론이고 8가지 사내 핵심 가치에 대하여 스스로를 평가해야 한다. 가장 첫 번째 항목은 '고객을, 고객에 의한, 고객을 위한 생각과 행동을 하자'다. 그 다음으로는 더 높은 기준, 빠른 실행, 변화와 도전, 최소 자원으로 최대 성과 내기, 자율과 책임 등의 가치가 있다. 사실 보기만 해도 지니고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항목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매 분기마다 정해진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면서 불편한 감정이 덕지덕지 남아있었다.

 

요새, 아니 꽤 오래 전부터 일에 순순하게 집중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내가 열정과 의지를 잃은 것 같다, 업무가 나와맞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로 내 탓을 해왔다. 그런데 오늘 '만드는 이의 행복'을 보니 빛좋은 살구처럼 보이던 핵심 가치에 개인의 행복에 관한 항목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모든 것이 고객과 회사를 위하여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들이었다. (사실 고객이라고 표현한 것도 결국 회사를 위하라는 것의 포장임을 안다.) 내 안에 있는 가치란 가치는 모두 동원하여, 혹은 가치가 부족하다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여 나의 쓸모를 만들어낸 다음에 헌신해야 했다. 그러면 인재가 된다.

 

물론 회사가 놀이터도 아니고 상담소도 아니다. 일을 시키기 위해 능력에 맞는 직원을 뽑고 그들의 사고력과 기술력을 활용하여 서비스와 제품을 만드는 시스템에서 개인의 행복을 고려해주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안다. 일의 의미를 잃은 지금 상태에서 이런 생각으로 회사에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탈출만 바라보고 있었다. 개인의 행복은 자기 스스로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고도 생각했다. 해야 할 일만 끊임없이 나열되어 있고 시간과 노력을 갈아서 무언가 해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고 해내길 바라는 굴레에서 지쳐버렸다. 회사에서는 더 큰 책임감과 오너십을 가지라고 이야기했지만, 오너가 아니라 오너십도 가질 수 없었다. 어차피 일은 위에서 내려왔고 시간이 지나면 다 바뀌어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입사 초기에 나름 포부도 컸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성장하는 것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도 잘한다고 해주었고 열심히 하는 내 모습에 취해 살았던 것 같다. 뭐 그때도 행복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적어도 보람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성장과 경험이라는 포장으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강조하던 오너십도 진짜 오너가 규정한 범위에서 발휘할 수 있었고, 그 선을 넘으면 트러블이 생겼다. 하라는 대로 하면 관계가 원만했다. 원하는 것을 진행하라고 해도 위에서 내려온 일들이 끊임없이 쌓여있었고, 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시간을 갈아서 성과를 내도 월급은 똑같았고 더 많은 책임과 난이도 있는 일만 나에게 돌아올 뿐이었다. 일처리 대기반 같다고 생각했다. 알아서 스스로 채찍질하고 역량을 키우고, 키워진 역량을 회사를 위해 사용하는. 고객과 회사의 성장을 위하라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그렇다면 나를 위해주는 것은 누구고 무엇일까.

 

만드는 이가 행복하지 않았다. 여전히 해야 할 것들에 치여서 의무적으로 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시키는 대로만 하면 시간이 아까워서 최대한 사고력을 끌어내고 있지만 그래도 열정이 생기지는 않는다. 이제 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 잘 이해해버렸다. 그래서 앞으로의 길은 홀로서기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회사에서 직원이란 자기네 서비스를 발전 시켜줄 노동자에 불과했으니까. 다만 정말로 만드는 이의 행복을 생각해주는 곳이 있다면 그 회사를 다녀보고 싶기도 하다. 진정으로 직원의 행복을 신경쎠주는 환경에서 나는 얼마나 보람을 느끼고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나 직원의 행복도 중요하다는 말이 그저 개인을 속여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곳도 있으니 조심은 해야 한다. 역시 뭘 하든 서로 간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이 중요하다.

 

또 딴 데로 샜는데 결론은 만드는 이의 행복을 위해서 나는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고, 진정으로 만드는 이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업이 있다면 다녀보고 싶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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