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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나

삶의 결정권은 개인에게 있다

by 점점이녕 2022. 5. 8.

살면서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당연히 사람마다 고민의 깊이는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그저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뿐이고, 다른 누군가는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끝낼 방법을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생각과 행동은 큰 차이가 있다. 실제로 행동을 하는 것은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육체적인 고통이나 남아있는 가족의 슬픔, 또는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한 가능성에 대한 생각 등. 그 모든 것을 생각하더라고 죽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두려움 속에서도 실행하게 되는 것 같다.

 

최근에 청년 고독사에 관한 영상을 본 적 있다. 노인 고독사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청년들도 고독사한다는 것이 너무 생경했다. 그들의 집을 정리하시는 분들이 삶을 떠난 사람들의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었다. 아마 2000년생이 있었을 것이다. 세대가 달라지는 저 숫자를 보면 아직도 교복을 입는 학생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어린 친구들이 어떻게 하다가 결국 수많은 생을 남겨두고 떠날 생각을 했나,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심지어 그들이 유품을 인도하길 가족들이 거절했다고도 말했다. 가족이 모두 행복하지 않음은 당연하지만 시신조차 인도하길 거부하는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 씁쓸하기만 했다. 세상에 내 편이 없다는 외로움이 결국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나 싶어서.

 

물론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너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기만의 삶의 철학과 의미를 가지고 그래도 종종 보람을 느끼며 살아갔으면 한다. 그러나 굉장히 이상적이고 무책임한 말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나도 자주 삶의 의미를 잃고 왜 살아가는지 번민에 빠지며 죽음을 상상하곤 하니까.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죄악으로 본다. 어릴 때는 종교가 신성하다고 배워왔지만 살아가면서 오히려 종교는 다름을 배척하는 것 같아서 부정적으로 느끼게 됐다. 자기 의지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사실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는 태어난다. 아이가 자립할 때까지, 아니면 거의 평생을 부모가 보살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아이를 사랑하고 잘 돌봐줄 자신이 없다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 정도의 책임감은 가지고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맞지 않나. 그리고 태어나는 것은 의지가 아니었으니 죽음만큼은 개인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분명 누군가는 살아있는 것이 고통일 수가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죽는 것이 슬프다는 이유로 그를 고통 속에서 살라고 과연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네가 죽으면 내가 슬프니까 너는 고통 속에서 살아줘’. 나는 안락사에 긍정적이다. 만약 아무리 생각해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럽다면 적어도 육체적인 고통이 없도록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을 끝낼 권리는 삶의 주인에게 있으니까.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줄 수 없다면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편하게 도와주는 것이 사람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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