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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나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by 점점이녕 2022. 5. 1.

(이전에 쓴 글 취합)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보는 나는 분명 다르다. 그것은 내가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이도록 행동한 결과다. 성실하고 착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느껴지게 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성실하지도 착하지도 능력 있지도 않은 사람이다. 이상적인 모습이 되기 위한 노력으로, 정작 나는 더 힘들어졌다. 연기를 꽤나 잘한 덕분에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더 커졌다. 나의 본모습을 들키면 사람들은 분명 실망할 것 같았다. 게으르고 때로는 무식하고 이기적이고.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이 왜 두려울까. 그만큼 내가 타인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성장 강박, 인정 욕구. 이런 것들은 나를 자기 비하에 빠뜨렸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하지?

 

요새는 칭찬을 받아도 순수하게 기쁘지 않다. 많은 업무를 잘 처리해 주었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문서 정리를 가장 잘하시는 분이다, 등등 확실히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지만 부담스러웠다. 잘한다는 말이 앞으로 더 잘하라는 이야기로 들렸고 잘하지 못하면 실망할 거라는 말로 들렸다. 문서 정리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자 문서를 업데이트할 때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없는지, 논리적으로 잘 정리가 되었는지 더 심하게 검열하게 되었다. 혹시나 빠진 부분이 있어서 나중에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하지 않도록 완벽하게 정리되었는지 몇 번이고 검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후 놓친 부분이 나오면 한숨을 쉬며 앞으로는 더 꼼꼼히 살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런 실수가 나의 무능력함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채찍질을 하며 살았다.

 

언제 한번은 회사에서 독서 스터디가 있었다. 스터디 전날까지 책을 읽기는 했지만 도저히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여 리뷰를 조금씩 정리하고 있었다. 스터디 시간이 다가왔지만 그래도 생각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정리된 것은 없고 점점 불안감에 휩싸였다. 심장이 매우 빠르게 뛰었고 식은땀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사라지고 싶었다. 갑자기 몸이 아파서 쉬어야겠다고 말하고 반차를 낼까,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물론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고작 독서 스터디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긴장할 일인가 싶지만 이 정도로 나는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아마 준비성도 떨어지고 생각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더 열심히 했다. 부족한 상태의 산출물이 곧 내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완벽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 것도 무능력함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더 완벽하게 더 빠르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퇴근하고서도 계속 일을 했다. 내가 원하는 기준이 아니라 남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시들어갔다. 많은 것들을 했고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속은 계속 쓰렸고 걱정은 여전히 한 더미였다. 아니, 책임감이 더 높은 업무를 맡게 되면서 걱정은 더 늘어만 갔다. 보람은 없고 걱정만 쌓여갔다. 앞으로의 인생이 걱정됐다. 이렇게 나를 옥죄며 살고 싶지 않은데.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일을 잘하는 것 같았다. 근심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점심이 되면 삼삼오오 모여서 밥을 먹으러 나갔다. 나는 딱히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 사람을 불편해해서 정말 친한 사람이 아니면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몰랐다. 당연히 속은 더부룩했다. 밥 먹는 속도가 느렸지만 상대방에게 맞춰서 빨리 먹게 되기도 했고, 상대방이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으면 그냥 밥을 버리기 일쑤였다. 소화도 안 되고 밥도 버리게 되니 그냥 점심은 혼자 자리에 앉아서 먹는 것이 편했다.

 

다들 그럭저럭 잘 다니고 있는데 왜 나는 갇혀있는 것 같은 갑갑한 기분이 드는지. 정말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지. 사기업이니 당연히 정년까지 일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사람은 평생 일을 한다는데, 이렇게 갇힌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40년을 더 일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 너무 답답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다들 가슴속에 사직서 한 장쯤 품고 있다는데 나도 남들이 포기에 그냥 잘 적응하면서 다니는 것 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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