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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나

관리받는 편안함에 젖어있지 말 것

by 점점이녕 2022. 4. 29.

 

연차가 높아지면서 더 내 생각이 들어간 기획을 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히스토리를 파악하고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 것인지 A부터 Z까지 기획한 다음, 이해 관계자들과 공유하고 개발자에게 전달한다. 개발자는 개발을 진행하면서 미처 기획에서 체크하지 못했던 부분을 질문하고 생각지도 않은 플로우를 다시 고민하면서 고객 경험을 설계한다.

 

창의적인 일을 하고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내 생각이 들어간 기획을 하게 된 것은 좋았다. 하지만 더 큰 영향력이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부담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내 기획이 잘못된 방향이면 어떡하지? 더 좋은 가치가 있는데 내가 그것을 캐치하지 못한 거면 어떡하지? 오히려 고객이 불편해지면 어떡하지? 등등. 내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걱정들이 갖게 된 권한에 맞춰서 더욱 커졌다.

 

한 프로젝트가 잘 안 풀리는 경우가 있었다. 원하는 플로우는 개발 공수가 너무 컸기 때문에 지금 가능한 공수 내에서 최적의 고객 경험을 설계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개발 공수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되는지, 안되는지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물어봐야 했지만 뭘 모르는지 몰라서 뭘 물어봐야 할지도 몰랐다. 주체적으로 일하지 못했다. 대략 정리하기는 했지만 개발에 끌려다녔고 결국 오픈된 서비스는 내 기준에서 최악의 UX가 되었다. 내부 고객들도 어떻게 작동하는지 계속 문의가 들어왔다. 나도 설명하면서 작동 정책에 대하여 개발자에게 물어보고 건너건너 전달했다. 실제로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VOC도 많이 들어왔다. 나는 서비스가 오픈된 날 집에 가는 길에 울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나는 기획력이 부족한가,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등.

 

UXUI를 포기할까 생각도 했다. 사실 시키는 대로 하면 편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군가가 시켜서 했다고 다른 사람 탓을 하면 끝나니까.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버그가 났을 때 어떤 개발자가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기획단에서 이 케이스에 대해 명시하지 않아서 버그가 난 것이라고 기획을 탓한 적이 있었다. 참 편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생기면 다른 팀을 탓하면 되니까. 그러나 막상 그렇게 살아가는 나를 그려보았을 때 또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도구가 되는 삶이라니.

보통 ‘자유롭다’라고 하면 아무런 걸림돌이 없는 편안한 상태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 생각대로 진행해야 했던 회사 프로젝트에서도, 회사를 벗어나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지금도 자유란 그저 편안함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래도 경영진 쪽에서 대략적으로 방향성을 정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회사를 떠나서 프리워커가 된다면 어떤 일을 할지, 어떻게 할지, 나를 어떻게 알릴지 등 모든 것을 혼자 진행해야 한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 선택에 대한 피드백을 들을 수도 없을 것이다.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월급은 이제 없다.

 

하지만 이제 다른 사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다. 휘둘리는 삶, 도구가 된 삶, 톱니바퀴가 된 삶을 생각하면 더 괴로울 뿐이다. 자유도 큰 스트레스를 가져오겠지만 자유를 포기한 삶은 괴로움 그 자체인 것 같다. 지금 9 to 6로 일을 하는 상황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함을 느끼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냉엄함을 견디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내가 원하는 프리워커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도 먹을 때 먹고, 하기 싫을 때 일을 하지 않는 삶은 아니다. 오히려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일을 하는 것이며, 내 가치관에 맞지 않는 일은 거부하고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쓰는 삶이다. 그 과정에서 나만의 콘텐츠가 나오고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그런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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