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네이버 블로그를 시작했다. 포토샵으로 만든 손글씨와 학교생활, 친구들과 놀러 간 이야기도 종종 적었다. 때로는 사회적인 이슈에 관한 생각도 적기도 했다. 사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가끔 블로그를 언제 시작했는지 궁금해질 때 들어가서 첫 포스팅부터 둘러보곤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성격이 많이 무던해지기도 했고 내향적인 성격으로 외부적인 모습은 굉장히 딱딱했지만 블로그에 기록된 내 모습은 딴판인 모습이 많았다. 이모티콘도 남발하고 맞춤법도 많이 틀리고. 심지어 슈퍼주니어와 FT 아일랜드를 좋아했을 때 관련 사진을 올리면서 00 오빠라는 등 지금은 전혀 사용하지 않을 호칭들도 많이 보였다. 취업할 때 블로그 주소를 적었는데, 회사 사람들이 혹시나 이 기록을 보지는 않았을까 창피하기도 했다. 낯간지러운 글들을 모두 지워버릴까 생각했지만 뭔가 과거의 추억을 지우는 것 같아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과거의 글을 보면 창피함도 있지만 새로움도 있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일들이 기록된 글을 보면서 새록새록 생각나기도 했다. 내가 이때 이런 경험을 했고, 이런 생각을 했고, 이런 책을 읽었구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친구와 만나면서, 가족 관계에서, 대학 과제를 하면서 이런 것들을 느꼈구나. 어릴 때의 내가 귀여워지기도 했다. 사실 굉장히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좋은 추억으로 남은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부정적으로 느낀 경험도.
오늘 오랜만에 회사 동료들과 카페에 가서 간담회를 했다. 나는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만나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에게는 스토리가 없었기 때문에. 최근에 자기 발견 글쓰기를 통해서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디자이너가 되었는지 상세하게 글을 적어 보았다. 실제로 블로그에 졸업을 준비하고 첫 사회생활의 느낀 점을 적었던 기록을 통하여 생생한 감정을 따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오늘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있어서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첫 사회생활에서 팀장님에게 커피 타는 것을 인수인계로 받았다는 이야기도 하며 멋몰랐던 사회초년생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했다. 막상 일기와 같은 기록을 할 때는 크게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자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된 것이다.
사실 지금 쓰는 글도 지금의 나에게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의식의 흐름을 기록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고 본다면 오늘의 나를 추억할 수 있는 과거의 흔적이 되지 않을까. 또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기도 하고.
회사에 다니면서 시간을 팔지 않기 위해서 진행한 이슈들을 잘 기록하자고 다짐한 것도 내가 일한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물론 프로덕트 디자인 작업을 하면 개발을 통해서 회사의 서비스가 되지만 IT 서비스는 굉장히 쉽게 바뀌기 때문에 내가 한 작업은 언제 어느 순간 대체되거나 사라질지 모른다. 내가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고 가시적으로 보여줄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내 노력과 시간의 가치를 주변 환경에 의하여 정해지게 두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의 서비스가 아니라 오로지 나만의 콘텐츠로 보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기록이었다.
2022년 12월. 2차 퇴사 일자로 잡아둔 날이다. 내가 지금 회사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내 역량을 높이기 위해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그 과정을 날려버리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기록해야 한다. 5년간의 나의 작업들을.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목적을 향해서 가치 있게 일했었다고. 비록 회사 시스템에서 한계를 느끼고 홀로서기를 다짐했지만 회사에서 일하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진심을 다해서 일했었다고.
기록은 간장같기도 하다. 바로 담갔을 때는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오히려 짜기만 한. 하지만 숙성이 될수록 진가를 발휘한다. 기록도 시간이 지날수록 진가를 발휘한다. 중요한 것은 꾸준하게 숙성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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