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전 팀장님의 어머님이 별세를 하셨다. 토요일인 어제 관련 내용을 공지 받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고 하루 지난 오늘 관련 안내에 나와 있던 팀장님의 계좌로 조의금을 보냈다. 조의 문자는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지 검색을 해보기도 했다. 부조와 조의의 차이는 무엇인지 헷갈려서 그것도 파악해보았다. 처음 공지가 올라온 슬랙에 그저 댓글만 다는 것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계좌로 조의금을 보낼 때 메시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보내는 사람 이름은 한글로 7자까지 밖에 작성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의 000’ 라고 뒤에는 이름을 넣고 조의금을 보냈다. 그러고 조금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같이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꼭 이렇게 계좌로 보내야했을까 생각하니 아닌 것 같았다. 오늘이 일요일이기는 했지만 다음 주에 출근 했을 때 직접 봉투에 더 긴 조의 문구를 작성해서 직접 드릴 수도 있었다. 내가 조금 예의가 없었는지 반성을 하게 됐다.
다음 주 금요일은 전 팀장님의 생일이었다. 생일을 챙기는 성격이 아닌데 내 캘린더에 왠지 모르게 전 팀장님의 생일이 적혀 있었다. 이걸 기록한 기억은 전혀 나지 않지만 결국 알게 되었으니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안 좋은 상황과 겹치다 보니 생일 선물도 즐거운 마음으로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계좌로 돈을 송금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는데 직접적으로 선물을 드리면서 마음을 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저런 선물을 고민하다가 오설록 티 세트를 구입하게 되었다. 다양한 맛이 있었고 일상적이지 않은 향이 마음을 풀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선물을 언제 전달할지, 어떤 메시지를 적을지 또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저 생일축하 한다는 문구는 시의적절하지 않은 것 같앗다. 하지만 조의만 표하기에도 이 선물의 목적과 어긋나기도 했고 너무 우울한 내용일까 싶기도 했다. 그러다 그냥 솔직히 적기로 했다. 생일 선물용으로 구입했지만 조금 조심스러운 감정이 있다고. 그래도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내가 전달한 무언가를 신경쓰는 이유는 아직도 타인의 시선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일반적인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지, 상대방의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내 상각과 감정이 제대로 전달이 될지. 그저 ‘힘내’라는 알맹이 없는 위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가 힘들 때 그런 위로를 받는다고 상상하면 별로 도움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소 형식적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렇다고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것이 낫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잘 모르겠다. 이럴 때 보면 나는 0개 국어를 하는 것 같다. 한국인에게 한국어로 위로를 건네면 되는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죽음에 관해서 생각도 해보았다. 내가 위로를 하고 싶은 이유는 상대방이 큰 상심을 했을 것 같아서다. 단번에 잊을 수는 없겠지만 슬픈 감정에서 조금은 벗어났으면 좋겠어서. 그런데 이 과정은 타인이 크게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 이겨내려는 마음 가짐이 중요하다. 그러나 또 오로지 개인에게만 달려있다고 하기에는 관계가 주는 위로도 분명 보고 경험해서 애매하기는 하다.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나는 정말 슬프고 일상 생활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감정을 타인에게 부여하며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분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그렇다면 그 세월의 시간 동안 가까운 사람의 떠남에 대해서 더 감정적으로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을까? 나는 그 나이가 되어보지 않아서 모른다. 그리고 이건 나이의 문제도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부모님과의 관계는 모두가 같지 않기 때문에 내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정말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나은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는 것.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내가 모든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큰 슬픔을 느끼는 인도적인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또 그건 아니다. 물론 사람들이 죽었다는 뉴스를 보면 슬프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하지만 사고로 죽은 이야기가 너무 많기 때문에 어느 순간 무감각해지기도 했다. 아, 또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빨리 잊어버린 적도 많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피난을 가다가 사망한 사람들을 보며 너무 불쌍해서 울기도 했다. 죽음의 무게와 눈물의 무게는 무엇이 다를까. 생명이 떠났다는 것은 도일한데 왜 나는 어떤 죽음에서는 슬픔을 느끼고 어떤 죽음에서는 큰 슬픔을 느끼지 않는가.
스토리? 약자? 이런 것들일까. 그 사람에게 얼마나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기도 하다. 그저 단순히 사고로 죽었다는 뉴스는 안타깝긴 하지만 마음에 크게 남진 않는다. 하지만 그 죽음이 내 상황이 될 때는 다르다. 가령 얼마 전에 아파트 붕괴 사고로 작업자들이 죽는 사고가 있었다. 가족들이 나와서 아버지를 빨리 구해달라는 상황을 보았다. 그 순간 그 작업자들은 우리 아빠가 되었고 그 가족은 내가 되었다. 가족들을 위하여 고된 노동을 하며 하루하루 살고 있었는데 한 순간의 사고로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눈물만 나왔다. 고생만 하고 떠난 부모님이 너무 안타까워서. 세월호 때도 그랬다. 내가 부모님이라면 내 자식이 떠났을 때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직 피우지도 못하고 진 꽃들이 안타까웠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디어에서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는 거의 매일 울다시피 한 적도 많은데 정작 할아버지의 죽음에서는 큰 슬픔을 느끼지는 못했다. 아니 슬프기는 했지만 크지는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다만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던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는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했을 때의 감정일 수도 있다.) 할아버지의 죽음보다는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엄마의 마음이 나를 갑갑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엄마가 너무 우울해하지 않고 더 나은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
죽음의 무게는 분명 다르다. 이것은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 나의 죽음과 남의 죽음은 분명히 다르고 내 지인의 죽음과 남의 죽음도 분명히 다르다. 죽음의 무게가 모두에게 동일했다면 세상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그렇다고 모든 생명의 떠나감에 고통을 겪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일상 생활을 할 수가 없다. 1분1초 마음의 고통으로 평생 눈물을 흘리며 살 테니까. 아니 오래 살 수도 없을 것 같다.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적당히 잊고, 신경쓰지 않고 삶을 살아가기 위함일까. 모든 사람들을 나와 동일시 한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게 되니까 적당한 이기심을 가질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것일까.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어떤 창조자의 생각이 들어갔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죽음에 동등한 고통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빼앗는 그런 세상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피해주지 않는 개인주의. 그 정도가 딱 적당하지 않을까.
'나야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소한 행복의 추구 (0) | 2022.04.17 |
---|---|
해킹에 지지 말자 (2) | 2022.04.16 |
브런치북 만들기 (1차 생각 정리) (1) | 2022.04.10 |
행동이 전부다 (0) | 2022.04.09 |
브런치 작가가 되다 (2) | 2022.04.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