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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나

나도 디자인 철학이 있다

by 점점이녕 2022. 3. 25.

이슈가 생겨서 고객의 마케팅 정보 수신거부율이 매우 높아져 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팀장님은 수신 동의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라고 하셨고 앞으로 회원가입할 때 자동으로 수신 동의를 받는 것은 어떠냐고 물어보셨다. 요새는 수신 동의 관련 정보를 직접적으로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동의로 넘기는 추세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전혀 아니었다. 개인정보 이슈는 점점 민감해지면 민감해졌지 고객 정보를 받는 것을 사전 동의 없이 수집할 수 었다는 것은 어디에선가 분명 본 것 같았고 그냥 체감상으로도 느끼고 있었다. 왠만한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마케팅 활용 동의를 받는 UI를 많이 봤으니까. 수많은 기업들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장벽이 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추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료 E 디자이너가 관련 법률과 타서비스를 분석하여 수신 동의는 고객에게 사전에 확실히 고지해야한다는 것을 팀장님에게 이야기했다.

 

나도 의견을 덧붙였다.

  • 안 그래도 점점 개인정보 이슈가 민감해지고 있는데 기본적인 윤리는 지켜야할 것 같다. 동의를 안 받는 서비스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서비스들이 판단의 기준이 되면 안 될 것이다.
  • 예전부터 우리 서비스 전체적으로 개인정보 관련 책임감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들기도 했다.
  •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안해서 수신동의 전환을 이끌어 내는 UXUI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좋지만 고객이 인지하지도 못하게 속여서 수신동의 처리해버리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처사같다.

 

그리고 좋아보이는 것을 지키면서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가장 베스트지만 좋아보이는 것 자체를 지키는 것이 목적 자체는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뭔가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 비즈니스 목적을 위해서 뭐든지 해야한다는 뉘앙스로 느껴졌다. 물론 기업 측면에서 오로지 고객 경험만을 생각할 수는 없고 비즈니스가 중요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행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굉장히 찝찝해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법률에 저촉되는 것이라도 진행할 수 있다는 의도가 포함된 말인가요?’

‘1차 목적을 분명히 하는 거죠’

 

 

또 다시 애매한 답변이 돌아왔지만 결국 비즈니스 목적을 우선시 하라는 의견이었다. 항상 이렇게 빙빙 돌려가며 본인이 원하는대로 유도하는 것이 팀장님의 스타일이었고 점점 진절머리가 나는 중이었다. 아무리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입장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나만의 디자인 철학이 있었다. 목적을 위하여 법을 무시하라는 것은 내 철학과 정체성에 위반되는 방향이었다. 정말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렇게 오너십을 운운하며 더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라고 했으면서 결국 항상 정해지는 방식은 누군가의 의견대로였다. 얼마 후에 동료 디자이너들과 스터디가 있었지만 서로 의욕을 잃어서 조금 형식적으로 진행이슈를 공유한 후에 우리 회사의 문화와 앞으로 방향성에 대하여 고민을 토로하는 자리가 되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한다는.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도 계속 신경쓰였다. 뭔가 가시가 걸린 듯 찝찝했다. 그리고 원래라면 영어공부를 해야했을 시간이었지만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서 메모장을 켜고 생각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문화가 맞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지만 그렇다고 사기를 쳐서 돈을 벌고 싶지는 않다. 나도 나 나름대로의 디자인 철학이 있다. 적어도 윤리는 지키는 디자인을 하자고. 그런 점에서 여기와 가치관이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었다. 한 순간의 생각도 아니고 꾸준히 주기적으로 들었던 생각이다. 그리고 팀장님과도 동일하다. 지금까지 계속 합리화하며 나를 다독이고 있던 것일 뿐. 내가 잘못 됐다고 생각하지도 않도 여기가 잘못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서로 맞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에 쉽게 바뀌는 것은 없다. 모든 관계가 좋을 수도 없기 때문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고 갈 필요도 없다. 그냥 서로 맞는 것을 찾아가면 된다.

난 내가 잘못 됐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 철학을 바꾸고 싶지도 않다. 사실 여기에 남아 있는다면 꽤 오래 편하게 일하며 돈을 벌 수 있겠지만 이건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이다. 가치 있는 것을 만들며 의미 있게 사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너무 안일하게 현실 안주하며 살아온 것 같다. 나를 낮추고 어쩔 수 없다며. 그러나 이런 안일주의는 결국 나를 잃어가는 과정이며 삶에서 도태되고 주도권을 버리는 것과 같다.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합리화 하며 버텨왔는데 이 감정을 꾸준히 반복시키면서 살고 싶지 않다. 버티는 삶, 합리화 하는 삶.

지금이 도전할 때가 아닐까. 왜 오늘 짜증나는 일이 발생했을까, 내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면, 조금 참았더라면 이렇게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을까 잠깐 고민해보기도 해보긴 했지만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터졌을 일이고 오히려 뒤늦게 터진 것일 수 있다. 별것 아닌 것에 죽자고 달려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담이 지금 딱 적당할 것 같다. 앞으로 내가 어떤 불만을 가지며 일을 하고 시간을 죽이며 살아갈지 예상이 되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

오너십을 가지라고? 오너십이 있기 때문에 이런 서비스를 하기 싫은 것이다. 사실 내 서비스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불편하든 문제가 많든 나와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나 좋자고 타인에게 불편을 주면 안된다는 내 철학에 따라서 내가 만드는 서비스도 그랬으면 한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한 사람의 마음대로 결정할 거라면 오너십이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들은 하라는 대로 할테니까.

갑자기 예전 자기발견 글쓰기 챌린지의 주제가 생각난다. 강박을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고. 윤리와 삶의 의미, 철학이 그것인 것 같다. 보통이면 별거 아니라고 넘어갈 것들이 나에게는 너무 크게 다가온다. 사람마다 터지는 포인트가 있는데 나에게는 이것인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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