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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나/[종료] 자기 발견 챌린지

Day 3-4. 자기역사연표

by 점점이녕 2022. 1. 13.

첫 번째, 떠오르는 기억들의 나열

 

 

#1_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할까? (2015)

2015년 9월. 24살에 다니던 대학의 교학팀에 취업을 했다. 대학교 4학년 때 도서관에서 근로를 하게 되었다. 모범시민이었던 나는 아주 부지런히 일을 했고 도서관 관장님의 추천으로 졸업을 하자마자 경영대 교학팀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2년 계약직이었다. 그때는 전공을 살릴지, 살리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살아야할지 매우 막막한 상태였기 때문에 돈을 벌면서 앞으로를 계획하면 좋을 것 같았다. 내 전공은 광고홍보였고, 전공을 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수업에도 크게 흥미가 없었고 스스로도 창의적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더 큰 문제는 너무 소심해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어려워했다. 상상속의 광고인은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사람들과 활발히 논의하고 주도적으로 다양한 팀을 이끌어 파급력 있는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흥미도 없었을 뿐더러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라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다른 길을 찾아야했다.

 

교학 업무는 어렵지 않았다. 매뉴얼만 잘 따르면 되는 일이었다. 그저 진지한 첫 사회생활의 시작이어서 걱정이 많이 되었을 뿐이다. 약 3일간 인수인계를 받았고 혹시나 실수를 할까 싶어서 모두 녹음을 하고 중요한 것들을 정리했다. 지금은 당장 퇴사 사유지만 팀장님 커피 타는 것도 인수인계를 받았다. 블랙 커피에 각설탕 1개. 이런 것도 일이라고. 그러나 어릴 떄에는 별 생각이 없어서 아침마다 커피를 타드렸다. 중간에 학장님이 캡슐커피 머신을 사셔서 수동으로 커피를 타는 업무는 다행히 종료되었다. 

 

한두달 간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자체가 좋았다. 그러나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쁜 일은 없었다. 졸업 기간에만 반짝 바쁘고 거의 매일같이 여유로웠던 것 같다. 심지어 할 일이 없어서 팀장님이 영화를 보라고 USB를 공유해주시기도 했다. 문득 계약직이 아니라 평생직장이라고 했을 때 이런식으로 살면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다. 의미없이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것이 중요한 업무. 띄어쓰기를 몇번 할지, 마침표를 어디에는 찍고 찍지 않을지가 중요한 공문쓰기. 문제가 생기면 최대한 다른 팀으로 떠넘기는 문화. 전화를 걸면 짜증부터 내는 철밥통. 술마시고 늦게 오거나 아예 나오지 않는 날도 있는 팀장님. 자기 딸의 통장을 만들어 오라는 팀장님. 의미없는 일을 하는 것도 싫었지만 이런 학교에 다녔다는 것이 참 씁쓸했다. 2년까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실업급여를 위하여 1년만 채우자고 마음을 먹었다.

 

 

#2_ 새로운 직업을 찾아서 (2016)

2016년 2월. 국비지원을 받아서 편집디자인양성과정에 등록을 했다. 이렇게 한 줄로 적었지만 디자인을 시작해보자고 생각하기까지도 참 고민이 많았다. 6시에 퇴근을 하고 8시부터 10시까지 매일 2시간씩 주5일을 학원에 나갔다. 집과 학교까지 거리가 2시간이었으니까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면 거의 자정이었다. 출근을 하려면 적어도 아침 6시에는 일어나야했기 때문에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은 맑았다. 그냥 의미없는 일만 하고 있었을 때보다 내가 직접 학원을 알아보고 수업을 듣고 디자인 툴을 이용하여 무언가 만들고 있다는 자체가 좋았다. 학교에서 일이 없을 때 학원 과제를 하면서 정말 열심히 다녔다. 만든 컨텐츠들을 블로그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학원은 10개월 과정이었기 때문에 8월에 1년 계약직을 종료 하고서도 꾸준히 나갔다.

 

 

#3_ 나의 첫 작품 (2016)

디자인 과정 10개월 중 마지막 2개월 과정은 포트폴리오 과정이었다. 이전 코스의 수업을 들으면서 과제도 열심히 하고 잘했다고 칭찬을 받았기 때문에 포트폴리오도 무사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첫날에 어떤 회사에 취업을 하고 싶은지 리스트업을 해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냥 작품을 만드는 줄 알았는데 회사를 알아오라니. 정말 너무나 막막했다. 하고 싶은 것도 불문명 한 상태였는데, 거의 최종 단계를 정해오라는 것과 동일했다. 정말 꾸역꾸역 디자인으로 유명한 회사와 광고로 유명했던 회사를 몇개 알아가기는 했다. 물론 정말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두번째는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정해오라는 것이었다. 또다시 막막해졌다.

 

포트폴리오 반에서 과제는 곧 생각이었다. 하라는 대로 하면 되었던 이전의 수업 방식들과 반대였다. 강사님은 어떤 디자인을 해보라고 절대 말을 해주시지 않았다. 내용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이따위로 살면 되는 것이 없다.' 이런식으로 강하게 말하는 스타일이이었고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오게 시켰다. 조금은 불만에 찼던 것 같다. 나는 돈을 주고 학원을 다니고 있고, 강사라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하여 가이드는 해줘야하는거 아닌가? 강사의 자격이 없어보였고 아무것도 안하고 돈을 버는 사기꾼 같았다. 이 때 슬럼프를 많이 겪었다. 분명히 포토샵, 일러스트, 드로잉 등을 배우면서 나도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과 확신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삭 주저앉은 느낌이었다. 잘한다 잘한다 소리를 들어서 정말 잘하는 줄 알았는데 가고 싶은 회사도 모르겠고,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디자인도 모르겠고,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학원을 1년 가까이 다녔지만 또 이 길이 맞나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은 그냥 흘러갔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했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정말 많이 고민을 했다. 그나마 서점에 가서 책 구경하는 것이 흥미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북커버 디자인을 해보기로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른 디자인은 쉽게 잊혀지지만 북커버 디자인은 꽤 오래 남는 디자인인 것 같았다. 파피용을 생각하면 검은 바탕에 파란 나비가 떠오르는 것처럼 그런 멋진 디자인을 해보고 싶었다. 그냥 버려지는 디자인이 아니라 누군가가 보관하는 그런 멋진 디자인. 다행히 대상이 정해져서 포트폴리오는 채워나갈 수 있었다. 물론 만드는 과정에 너무 심한 슬럼프로 집에서 울기도 많이 울고 학원도 나가지 않은 적이 있다. 그냥 이대로 포기해버릴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강사님의 문자를 보고 다시 학원을 나갔다. (아쉽게 문자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츤데레 강사님이었나 싶다. 거의 마지막에 가서는 나보고 센스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촌스럽다고 까이고 종종 작은 당근도 받으면서 꾸역꾸역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나갔다.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하니 다시 자신감이 살짝 생겼다. 나는 참 오락가락한 인간인 것 같다. 2개월이 생각보다 짧아서 학원 과정이 끝나고 난 후에도 집에서 혼자 컨텐츠 완성도를 높여서 포트폴리오를 완성시켰다. 

 

eylee_포트폴리오.pdf
19.62MB

 

좋았다. 나의 생각의 산물이 하나 세상에 태어났다. 대학을 4년 동안 다니고 나서도 어떻게 살아야할지 정하지 못했고, 지금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무엇을 얻었냐고 생각해보면 딱히 뭔가 없었다. 그저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 정보를 외우고 시험을 보고 다시 정보를 잊어버리고. 그게 전부였다. 물론 내가 진정한 공부에 관한 철학이 없어서였을 수 있다. 잘해야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학점이 좋기는 했지만 학점보다 다채로운 포트폴리오가 훨씬 만족스러웠다. 이 포트폴리오로 이제 정말 취업을 하고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4_ 편집 디자이너가 되다 (2017)

운이 좋게 바로 취업이 되었다. 디자인 비전공자라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공부를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최저 조건으로 입사를 했다. 공부를 하는데 돈을 준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니까. 이 회사는 아직까지 다니고 있다. 벌써 만 5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편집 디자이너로 입사를 했다. 나의 업무는 명함, 리플렛, 전단지, 현수막 등 인쇄물 관련된 모든 디자인을 하는 것이었다. 아주 현타가 왔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창의성이 중요한 업무라고 생각했는데 거의 공장처럼 하루에 최소 2개씩 뽑아내야 했다. 색상과 레이아웃 등 감각적인 것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팀장님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마케터였다. 디자이너의 성과는 작업한 디자인의 갯수로 평가를 받았다. 아, 이게 디자이너인가?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회사에서는 상업적인 디자인을 할 수밖에 없고, 개인적인 예술을 하려면 혼자 일하라고. 맞는 말이다. 회사에서는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이해는 갔지만 아쉬웠다. 하지만 나는 또 열심히 했다. 그리고 비전공자인데 잘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뭐 내가 예술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디자인이 괜찮게 나오면 만족스럽기도 했고, 자체적인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작업한 디자인들을 모두 게시하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것은 좋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사라지지 않고 무언가 남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북커버 디자인을 할 때도 그랬다. 전단지를 받고 집에 보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책은 각자의 책장에 꽂혀있지 않은가. 그래서 전단지 디자인보다 북커버 디자인이 더 가치있게 느껴졌다. 회사에서 디자인을 뽑아낼 때도 너무 기계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만든 것들이 전부 웹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내가 이런 작업을 했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 버려짐, 사라짐, 증명, 남아있다, 인정, 쓸모, ... 뭔가 내가 중시하는 가치가 잡힐 것 같으면서도 아직은 규정하지 못하겠다. 느낌만으로 남아있다. 

 

 

#5_UXUI 디자이너가 되다 (2018)

인쇄물 디자인을 하면서 우리 웹사이트가 디자인 탐색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불편사항을 발견했다. 복수의 키워드를 입력하면 각 키워드가 포함된 디자인이 검색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키워드 전체를 1개 단어로 파악하여 아무것도 검색되지 않았다. 카테고리는 상품별로 중구 난방이었다. 디자인이 수만 개가 있었지만 정작 필요한 디자인을 찾는 것이 너무 불편하여 제대로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현재 탐색 상태의 불편한 사항과 개선하고 싶은 방향에 대하여 문서를 작성했다. 팀장님이 그 글을 보셨고, 기획한 대로 서비스 개선 작업을 한번 해보라고 하셨다. 키워드 단위 검색 개선, 색상/스타일 검색 추가, 상품별 카테고리 통일, 정렬 방법 추가 등 하고 싶은 탐색 방법들을 모두 리스트업하여 작업을 진행했다. 이 업무를 시작으로 나는 UXUI 디자이너가 되었다. 편집 디자이너로 입사한지 약 6개월 뒤였다. 초기에는 템플릿 디자인과 UXUI 디자인을 병행하다가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UXUI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UXUI의 장점은 서비스와 더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템플릿 디자인이 수많은 컨텐츠 중 하나를 차지 한다면 UXUI는 서비스 그 자체였다. 사이트에 들어와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가는 것, 그 과정 자체가 UXUI였기 때문에 더 의미있는 일을 하게 된 것 같아서 좋았다. 물론 그만큼 책임감이 더 커졌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다. 

 

 

#6_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되다 (2022)

언제부터 였는지는 모르겠지만 'UXUI 디자이너'라는 직군이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변경되었다. 2022년 현재까지 진행 중인 나의 직무다. 회사마다 UXUI와 프로덕트를 의미하는 바는 다르지만 UXUI보다 프로덕트가 더 큰 범위인 것은 확실하다. 기능이 아닌 서비스 자체를 총괄하는 역할로 변경된 것이다. 더 많은 것들을 책임감있게 맡아달라는 회사의 요구였을 것이다. 프로덕트에서는 커뮤니케이션과 개발, 마케팅, 데이터 지식들이 훨씬 중요해졌고 리더십까지 요구되었다. 연봉 테이블을 상향하는 등 처우도 나아졌고 더 영향력이 생긴 것 같아서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불안했다. 그놈의 인정 욕구 때문에 잘해내지 못하면 내 실력에 실망할 것 같았다. 배우고 알아야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어떤 분야의 공부를 먼저 해야하는지 막막했다. 그리고 UXUI 전문성도 부족한 것 같은데 개발이나 데이터를 학습하는 데 시간을 들인다면 오히려 뭣도 아니게 될 것 같았다. 제너럴리스트냐 스페셜리스트냐 하는 고민도 추가되었다.

 

고민은 꼬리를 물고 결국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내 길이 맞을까? 하는 직무 자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들이 어떻게 하면 회사가 바라는 모습을 충족시켜줄까에 대한 것들이었다. 데이터와 개발 지식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데이터와 개발을 배워야 해, 리더십을 요구하니까 리더십을 키워야 해. 내 기준이 없었다. 물론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시작은 스스로 했지만 성장하는 과정의 주도권을 빼앗긴 것 같았다. 무엇을 배워야하는지 우선순위 파악도 되지 않는 것은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스스로 정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는 주변의 요구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기준을 세워서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회사에서 리더십을 요구하니까 맞지도 않는 리더십을 스트레스 받으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추후 타인에게 영향력 있는 컨텐츠를 제공하기 위해서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그들을 잘 리드하는 연습을 하면 큰 도움이 될거야'와 같은 개인적인 필요성과 목표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7_현타 (2021)

회사 동료가 중기청을 받아 전세를 구했다고 했다. 집을 구했다니 뭔가 대단하고 신기했다. 동료의 집에 놀러가서 넓지는 않지만 통유리창에 뻥 뚫린 풍경이 보이는 나만의 보금자리가 부러워졌다. 그렇게 나도 중기청을 알아보았다. 100% 지원을 받으면 총 1억을 대출받을 수 있었고 약 3천만원 정도를 보태서 전세를 구해보자고 다짐했다.

 

어플을 통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코딱지만한 방이 왜 이렇게 비싼지. 그전까지 집에 관심이 없어서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심각할 줄 몰랐다. 나도 모르게 '방'이라고 적었는데 차마 '집'이라고 적을 수 없었던 무의식이 손가락에 반영된 것 같다. 사기매물에 읽씹도 당하면서 두 곳 정도는 실제로 집을 보러 갔었다. 도저히 1억이 넘어가는 집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고 작았다. 그리고 막막해졌다. 1억이 작지 않은 돈인데 이런 돈을 가지고서도 제대로된 집을 구할 수 없다니. 말 그대로 현타가 왔다. 열심히 일하고 월급을 저축하면 부자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집도 언젠가는 생기겠지, 그냥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8_ 아르바이트 (2011-2014)

위에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은 24살에 시작했다고 적었지만 아르바이트는 대학생 때부터 계속해오고 있었다. 알바를 하게 된 이유는 물론 용돈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인간관계였다. 너무 내향적이고 소심해서 사람 상대하는 것을 어려워했기 때문에 이런 상태로는 제대로 살지 못할 것 같았다. 앞으로 대학도 다니고 회사도 다니려면 많은 사람을 만나야했기 때문에 사람 대하는 것을 연습하기 위해서 알바를 해보자고 다짐했다.

 

첫 아르바이트는 20살에 시작한 마트 캐셔였다. 중학교 친구가 소개해줘서 시작하게 되었다. 주말 저녁 6시에서 11시까지 5시간을 일했다. 시작은 저녁 6시였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아르바이트를 가야 한다는 생각에 오히려 일하지 않는 시간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월요일 아침 9시에 수업이 있었고 학교까지 편도 2시간이 걸려서 5시 30분에는 기상을 해야했기 때문에 학업에 지장을 줬었다. 약 1달 정도로 가장 짧게 해 본 아르바이트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계산을 하면서 어떤 할아버지가 공부를 안하니까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 한 일이었다. 물론 대꾸를 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가 공부를 하고 일을 하는지 본인이 어떻게 안다고 함부로 말하냐고, 저런 개념없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파리바게트에서 6개월 정도 일을 했다. 이번에는 직접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찾아서 지원한 곳이었다. 이전 경험으로 저녁 알바는 월요일 수업에 너무 피해를 끼친다는 것을 느껴서 오전으로 구했다. 시간은 주말 아침 7시에서 오후 1-2시였다. 하는 일은 주방보조였다. 제빵 기사님을 돕고 튀김, 초콜릿 데코, 크림 채우기 등과 같이 간단한 빵을 만들고 철판 정리하는 일을 했었다. 힘들었던 것은 알바도 7시에 시작을 해야했기 때문에 일주일 내내 거의 5시 30분에 기상을 해야했다. 아마 내 기억 상으로는 이 시기에 시간표를 잘못 짜서 주 5일 9시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최악의 수강신청을 했던 것 같다.

 

파리바게트에서 기억나는 것은 제빵 기사님이었다. 24살이었는데 조금 양아치 같은 사람이었다. 매번 클럽 간 이야기를 하고 사장님 뒷담화를 했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언제는 케이크를 만들면서 자기 손가락으로 생크림을 찍더니 먹어보라고 했다. 물론 먹지 않았다. 또 한번은 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학생과 사귀고 있다고 했다.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듣게 되었고 속으로 그 친구는 왜 아저씨와 사귀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20살에게 24살은 아저씨였던 것이 지금은 충격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늙어보이긴 했다. 여하튼 제빵기사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언제 그만둘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사장님이 다른 분에게 가게를 팔면서 같이 그만두겠다고 말을 하고 알바를 종료했다. 

 

세 번째 아르바이트는 뚜레쥬르다. 2년 6개월로 가장 오래 일한 곳이다. 일을 하기 싫어서 파리바게트를 그만 둔 것이 아니라서 친구가 소개 시켜 준 뜌레쥬르에 바로 출근을 했다. 여기는 사장님도 그럭저럭 괜찮아서 오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시간표를 잘못 짠 이후에 되도록 수요일 공강으로 시간표를 구성했는데, 공강이었던 1일을 포함하여 주말까지 일주일에 3일을 일했다. 사정을 많이 봐주셔서 졸업까지 계속 일을 할 생각이었지만 사장님이 다른 사업을 시작하신다고 가게를 팔게 되면서 그만뒀다. 같은 자리에 이디야가 들어왔고 사장님이 이디야 사장님에게 나를 추천해주셨지만 사정이 있어서 소개 자리에 나가지 못했다.

 

대학생이나 되었으니 용돈은 알아서 벌어서 쓰고 싶었기 때문에 다음은 어떤 알바를 해야할까 고민했다. 운이 좋게도 3학년 2학기에 학교 도서관 근로장학생으로 선정되어서 높은 시급을 받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최저 시급이 486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근로장학생은 시급을 8500원이나 주었다. 이디야에 나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는데 오히려 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어서 좋았다. 일은 더 여유롭고 돈은 더 벌고 최상의 아르바이트였다.

 

 

#_9 휴식이 필요할까 (2022)

생각해보니 20살에 시작한 아르바이트를 포함하면 31살인 지금까지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다. 대학생 내내 알바를 했고, 졸업하자 마자 취업을 했고, 일을 하면서 학원을 다녔고, 1년 계약을 종료하고서도 학원을 다니며 포폴을 만들었고, 약 4개월간 취업준비를 하고 입사를 하여 지금까지 계속 일을 하고 있다. 1학기 휴학과 4개월 취업 준비 과정을 빼면 계쏙 뭔가를 하고 있었다.

 

최근에 퇴사를 하고 싶은 이유도 너무 생각없이 일만 하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고민이 돼서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인생 무의미론으로 1-2년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나'에 대하여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책에 파묻혀 살아보고 싶기도 했다. 목적은 흔들리지 않는 삶의 목표와 철학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1-2년 동안 책만 읽는다고 해서 삶의 목표를 정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도 있다. 결국 답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저 다시 회사에 취업하는 결과만 낳으면 어떡하지? 또한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다. 동생은 알바를 전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까지 불안정한 생활을 한다면 걱정이 배가 되실 것 같았다. 물론 회사를 다녀야만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퇴사를 한다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내가 생각한 자기발견의 시간 동안은 돈을 쓰기만 할 것 같았다. 여러모로 어떻게 살지에 관하여 고민이 많다. 

 

 

# 유년기, 초딩 (1992-2004)

나의 기억은 지하에 살고 있는 집에서 시작한다. 방 2개에 거실 하나. 5식구가 살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언니와 나는 한 방을 썼고 엄마와 아빠, 동생이 한 방을 썼다. 한번은 폭우가 쏟아져 집이 물에 잠기는 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기생충을 실제로 겪은 것이다. 엄마와 아빠가 바가지를 들고 계단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물을 밖으로 퍼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집에는 물이 찼던 흔적이 벽지에 새겨졌었다. 

 

나는 낙서를 잘 하는 아이였다. 집의 모든 공간에 동그라미 아래 세모가 붙은 여자아이 그림과 나의 이름을 적어놓고 다녔었다. 책상, 벽지, 장농 등등.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언제는 유치원을 가기 위해서 아침에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동생이 의자에 올라가서 나를 향해 유리컵을 던진 적이 있다.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고 컵은 깨졌다. 다행이 줄줄 흐르지는 않았지만 머리에서 피가 났고 엄마는 유리조각을 털고 피를 닦아주셨다. 그리고 나는 유치원에 갔다. 엄마가 나를 강하게 키우셨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동생은 나를 자주 괴롭혔던 것 같다. 명절에 층이 꽤 높은 산소에 간 적이 있다. 동생이 나를 밀어서 아래 층으로 떨어졌는데 운이 나쁘게도 떨어진 곳에 있던 묘가 테두리에 돌벽이 쳐진 묘였다. 덕분에 돌 모서리에 배가 살짝 찢어져서 또 피가 났다. 위를 올려다보니 아빠가 동생을 때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아픈 척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동생이 매우 어릴 때여서 지금 물어봤자 대답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왜 그랬을까 참 궁금하다.

 

웅비웅변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어릴 적부터 확실히 내성적이었던 것 같다. 아빠도 그 모습을 보고 말을 잘 하게 만들기 위하여 웅변학원을 보냈다. 학원에서 웅변대회를 진행했을 때 열심히 홍당무를 뽑았던 기억이 가물가물 난다. 이런저런 말을 하도 난 뒤 '외칩니다!' 라고 소리지르면서 두 팔을 벌려 마무리 하는 것이 웅변의 끝이었다. 학원은 다녀서 활발해 졌냐고 하면, 아니다.

 

초등학생 시절에도 여전히 내성적이었다. 말이 정말 없어서 별명이 벙어리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을 하는 것이 창피했던 것 같다. 큰 소리를 내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6학년 때였나? 발표를 하면 모둠별로 동그라미를 1개씩 그려주고 동그라미가 가장 많은 모둠에게 혜택을 주는 프로세스가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발표하면 동그라미를 3개 준다고 하셨다. 물론 나는 발표를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말하게 시켰던 것 같다. 체육 시간에는 한명씩 나와서 외벽에 약 5초정도 소리를 지르는 것을 시켰다. 한 줄로 서서 소리를 지를 차례를 기다리며 나는 벌벌 떨었던 것 같다. 그 시간을 너무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차례는 다가왔고 나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물론 속으로는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그냥 서있었고 선생님은 기다리다가 소리를 지르지 못한 사람은 옆으로 빠져있으라고 하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여자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조금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성격 덕분인지 친구가 거의 없었다. 게임을 좋아했는데 아마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활동이어서 그런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집에 컴퓨터가 처음 생겼다. 모니터 두께가 엄청나게 큰 컴퓨터였다. 삼보 컴퓨터였나? 아무튼 컴퓨터는 1개였기 때문에 언니와 동생과 컴퓨터를 차지하기 위해서 많이 싸웠다. 서로 하겠다고 잡아당기다가 마우스를 많이 끊어먹었던 것 같다. 그때는 강제 컴퓨터 금지 기간이었다. 그렇게 내 시간을 쟁취해가며 한 게임은 바람의 나라, 트릭스터, 그랜드체이스 같은 것들이었다. 특히 바람의 나라를 생각하면 순수했다고 생각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바람의 나라는 레벨 19까지는 무료로 이용이 가능했지만 20부터는 유료로 전환되는 정책이 있었다. 레벨이 20이 되는 순간 얼럿창이 뜨면서 게임이 꺼졌다. 어린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운이 나쁘게 버그가 걸린 줄 알았다. 매일 아침 하나님께 오늘은 게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해주세요- 기도를 하면서 며칠동안 접속을 시도했던 경험이 있다.

 

6년간 교회를 다녔다. 집 근처에 있는 교회로, 기독교는 아니었지만 아빠가 종교를 경험해봐야 한다고 억지로 보냈다. 경험만 하면 된다면 왜 이렇게 오래 다녔는지 의문이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다녔다. 6학년인 이유는 중학생이 되면 절대 가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 되면 노는 것은 좋았지만 교회가는 것이 싫어서 아침에 억지로 자는 척을 했었다. 무서운 것은 제시간에 교회에 오지 않으면 교회 사람들이 집까지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억지로 끌려 간 적도 있지만 치열하게 차는 척을 한 날은 교회를 가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때는 아침에 텔레비젼을 키면 나오는 디즈니 만화를 보며 여유롭게 일요일을 즐겼던 것 같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 개그콘서트가 나오면 학교를 가야한다는 생각에 슬퍼졌다.

 

 

# 중고등학생 (2005-2010)

중학생이 되면서 조금씩 말을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조용한 학생이었다. 중학생 때는 그리 특별한 기억이 없다. 꿈도 목표도 별로 없었고 초등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에 가면 집에가서 게임할 생각을 했었다. 그때 반에서 몇몇 친구들끼리 메이플스토리를 같이 했었다.

 

네이버 블로그를 중학생 때 시작했다. 첫 기록을 보니 손글씨를 올렸다. 포토샵으로 예쁘게 꾸미는 것에 조금 관심이 있어서 다음 카페에 가입하여 포토샵 강좌를 보며 배웠다. 친구들에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네이버 지식인에서 손글씨를 요청하는 질문을 찾아 요구사항에 맞게 만들어주고 내공을 모으기도 했다. 이런 경험 때문이었을까, 환경 미화로 교실 뒤에있는 게시판을 꾸며야되는 일이 있었는데 친구들의 추천으로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에 대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한 후에 예쁜 브러시를 다운로드 받아서 꾸몄다. 선생님도 좋아하셨던 것 같다.

 

고등학생은 고민의 시절이었다. 1학년 때는 이과, 문과를 걱정했고 2, 3학년 때는 당연히 대학 걱정을 했다. 초등학생 때 엄마아빠에게 하버드를 간다고 말을 한 기억이 있는데 아주 헛된 목표였다. 물론 어디서 하버드가 좋은 대학이라고 주워들어서 그냥 말을 한 것이겠지만. 진로 고민과 별개로 친구에게 부모님의 이혼 고민을 말했던 기억도 난다. 엄마 아빠는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크게 싸우실 때가 있었다. 한번은 정말 물건을 던지면서 싸우셔서 나는 방에 틀어박혀 무서워했었다. 원래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 부모님이 이혼하시면 어떡하지, 만약 엄마 아빠 중에 선택을 해야한다면 누구를 선택해야할까, 별별 고민을 다 했다. 물론 지금은 잘 살고 계시지만.

 

나는 큰소리가 나거나 싸우는 것을 무서워했던 것 같다. 회피형 성향이 강해서 싸울 일이 생기면 그냥 피해버리곤 한다. 짜증이 날 때는 아예 말을 하지 않는 편이다. 엄마를 닮았다. 아빠와 싸우고 난 후에 엄마는 아빠를 한동안 없는 사람으로 치부한다.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풀어지면서 괜찮아진다. 그러다가 다시 싸우면 또 반복된다. 그 모습이 좋지 않아보였지만 내가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더 심했다. 사람에게 실망을 하면 풀 생각도 하지 않고 관계를 끊어버렸다. 물론 상대방이 와서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하면 풀렸지만 내가 먼저 관계를 풀 시도는 하지 않았다. 이런 인간관계 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사람들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웠다. 다가가고 이야기를 하고 납득시키고 감정소모를 하는 것보다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편했으니까. 그렇게 고등학생 같이 다니던 친구들 중에 아직까지 딱 2명만 만나고 있다. 

 

여전히 사람과 깊은 관계 맺는 것은 어렵다. 사람들에게 최대한 친절하려고 하지만 자주 듣는 이야기는 벽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어릴 적부터 친구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을 하고 관계를 만들어가고 친해지는지 모르겠다. 괜히 친한 척을 하는 것은 아닌가, 궁금하지도 않은데 내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 하는 질문이 혹시 실례되는 질문이 아닐까 등등. 업무적으로 만나는 관계는 일 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사적인 관계가 문제였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너무 어려웠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나의 본 모습을 알게 되면 매우 실망할 것 같았다. 친절하다, 착하다, 성실하다, 열정적이다. 되도록 그렇게 보이도록 가면을 쓰기는 했다. 좋은 사람으로 느껴졌으면 좋겠으니까. 그러나 나는 상식도 많이 부족하고, 속으로 욕도 자주하고, 게으르고, 귀찮으면 안 씻을 때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 시간만 낭비하는 경우도 많다.

 

그냥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살면 좋을텐데. 자기 발견을 통해서 나의 기준이 세워지면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는 것도 많이 줄어들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너무 사람을 피하기만 한 것 같아서 다가가지는 못할 망정 적어도 피하지는 말자고 최근에 다짐을 했다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사적인 1:1 약속은 절대 잡지 않았을텐데, 피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는 어색하더라도 만나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한 성과는 회사에서 술친구 한 분이 생겼다는 것.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겠지? 

 

 

 

 

 

 

더보기

#1

학교교학팀에 계약직 취업. 일의 의미에 대한 첫 진지한 고민

 

#2

국비지원을 받아 디자인 학원을 다닌 것. 편집디자인 양성과정. 첫 포트폴리오. 비전공의 시작

 

#3

편집디자이너로 회사에 입사하여 처음으로 서비스 개선 제안을 하게 된 것. UXUI 디자이너의 시작

 

#4

3D 모델링 서비스의 발전. 유투브로 배우고 레퍼런스가 없는 상태에서 신 서비스를 만들어냈다. 연봉이 대폭 상승. 대체불가 인력이 되었다고 봄

 

#5

첫 장학금. 1학년 1학기 떄 기대하지도 않았던 첫 장학금을 받았다. 더 열심히 하게된 계기가 되었음.

 

#6

첫 주식 시작. 걱정보다 별거 아니었음을 느낌. 왜 미리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감이 들었다. 그렇게 코인도 시작...

 

#7

부자아빠 가난한아빠, 부의 추월차선을 읽음. 인생과 일에 대하여 다시 고민해보게 되었다. 노동자가 아니라 생산자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8

친한 동료의 전세집 방문. 중기청을 받아서 전세를 구하려고 알아봄. 2군데 정도 돌아다니고 현타가 왔다.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

 

 

기타 생각들

- 화실 다님

- 대학생 동아리 활동

- 과대표로 졸업

- 알바를 오래했다. 알바도 일이라고 치면 거의 초등학생 때부터 제대로 쉰 적이 없는 것이 아닐까?

- 고등학생 때 논술을 배운 것. 논술로 수시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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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유년 시절

- 사실 꿈이랄 게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지?

- 행복했던 기억... 행복은 항상 생각해도 어려운 것 같다. 행복까지는 잘 모르겠고 좋았던 기억이라면 그냥 갑자기 63빌딩에서 거꾸로 뒤집어도 떨어지지 않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친척들과 다 같이 갔었던 것 같다. 뒤집어도 떨어지지 않는 아이스크림이 참 신기했었다.

- 웅비웅변학원을 다녔다. 어릴 떄 부터 소심한 것이 티가 많이 났나보다. 아빠가 활발해지라고 보냈다. 무를 뽑은 웅변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 동생이 머리에 유리컵을 던져서 머리에 피가 났던 적이 있다. 엄마가 유리를 털어내고 피를 닦고 유치원에 보냈다. 그때부터 강하게 길러졌던 것일까

- 동생이 산소에서 밀어서 높은 곳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 운이 안좋게 떨어진 묘가 테두리에 돌무덤 처럼 되어있어서 모서리에 배가 긁혔다.

- 내 성격을 만든 경험? 잘 모르겠다. 항상 내성적이었던 것 같다. 유난히도 내성적이었던 OOO

- 반지하에 살던 때 홍수가 와서 집이 잠겼던 적이 있다. 엄마아빠가 바가지로 물을 퍼낸 기억이...

- 아빠가 슈퍼를 했었다. 아빠 몰래 먹을 것을 훔쳐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 동생을 잃어버려서 엄마가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기였다. 엄마, 나, 언니, 동생이 같이 있다가 엄마와 나, 언니가 가게에 들어갔고 동생은 없어졌다. 동생은 3살이었다. 다행히 아빠가 운영하던 가게로 돌아갔었다.

 

초등학생

- 매우 조용한 학생이었다. 말이 없어서 별명이 벙어리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내가 발표를 하면 다른 학생들은 스티커는 1장 받을 떄 나는 3장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지..

- 5학년인가 6학년 때 일진 학생이 있었던 것 같다. 청소를 대신 해달라는 말에 아무 생각없이 청소를 해줬는데 선생님이 내가 왕따를 당한다고 생각했나보다. 모두 돌아간 후에 나 혼자만 남아서(남겨서?) 괜찮냐고 달래주신 적이 있다.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뭔가 나를 위해준다는 생각에 울면서 집에 돌아갔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왕따가 맞았나? 친구가 없기는 했었다. 말을 안했으니 친구가 있을리가..

- 게임을 좋아했다. 특히 넷마블 게임인 트릭스터, 그랜드체이스, 바람의 나라를 많이 했었다. 초등학교 2학년때 처음으로 컴퓨터가 생겼던 기억이 난다. 모니터가 정만 큰 컴퓨터였다. 언니와 동생과 서로 하겠다고 싸우도 잡아당기다가 마우스 선을 끊어먹은 적도 많다.

- 순수했던 기억? 바람의 나라라는 게임을 했었는데 레벨이 20이 넘어가면 유료로 전환이 되어서 더이상 게임이 불가능했다. 그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버그? 렉인줄 알고 하나님한테 내일은 접속이 되게 해달라면서 기도를 했었던 적이 있다. 

- 6년간 교회를 다녔다. 기독교는 아닌데 아빠가 종교를 경험해봐야 한다고 해서 다니게 되었다. 경험 치고는 너무 오래다녔다. 방학 때는 며칠동안 출석체크를 꾸준히 하면 선물을 준다고 해서 새벽, 점심, 저녁에 교회를 계속 나갔던 적이 있다. 물론 가서 졸았다. 초등학생에게 새벽 6시는 매우 이른 시간이었다. 

- 인형뽑기가 유행이었다. 매우 잘 뽑히기도 해서 인형을 뽑고 가게에 맡긴 후에 갯수를 체크하여 여러가지 상품으로 교환을 했었다. 

- 배틀로얄, 엽혹진, 건반게임

- 꿈, 취미 생활을 물으면 화가, 피아니스트로 적었고 독서라고 적었다. 물론 셋 다 전혀 하지는 못했다.

 

 

중학생

- 공부를 못했었다. 반에서 26등이었나? 엄마한테 돌머리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때였나... 돌머리가 신경쓰이던게

- 초등학생 때보다는 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소심했다. 사실 별 다른 기억이 없다.

- 아.. 친구가 있었는데 풍물반이라서 수업이 끝나고 연습 시간을 가졌다. 나는 풍물반이 아니었지만 그 친구를 복도에서 기다리고 끝나면 같이 집에 갔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기는 하다. 

- 아빠가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야채를 파는 일을 했다. 아빠는 항상 자신을 창피해하지 말라고 했었다. 학교를 끝나고 돌아다는 길에 아빠를 종종 보기도 했었다. 아빠가 창피하지는 않았다. 그렇겠지?

- 이때로 게임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다.

- 포토샵이 유행이었다. 뭔가 신기해서 혼자 배우다가 네이버 지식 인에서 손글씨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보고 많이 만들어주기도 했다. 교실 뒷편 게시판을 꾸미는 일이 있었는데 포토샵을 한다는 것을 친구들이 알아서 선생님이 나에게 요청을 한 적이 있다. 별거는 아니었지만 꾸미기 브러시를 다운로드 받아서 남한산성 관련된 컨텐츠를 만들었던 것 같다. 00옥 선생님이었던 것 같은데 칭찬을 받았다. 그 후로 포토샵을 집에서 더 연습해보고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었다.

- 네이버 블로그를 처음으로 시작한 기간이다. 창피하지만 지금 내역이 남아있다. 나는 슈퍼주니어를 좋아했고 이것저것 꾸미고 만드는 취미가 있었다. 지금보니 첫 시작이 2006. 12. 12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15살이다. 중2때 블로그를 시작했었다. 처음 글이 '손글씨'다.

- 인터넷 소설이 유행했었다. 언니랑 보람책방이라는 곳에서 소설과 만화책을 많이 빌려봤다. 4대천왕 어쩌구 관련된 소설을 많이 봤었다. 귀여니도...

- 지금 블로그를 둘러보다가 너무 오글거리고 창피하다. 나에게 이런 시절이... 하...

 

 

02) 사람&관계

-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사람들. 당연히 엄마아빠다. 굉장히 자유롭게 자랐다. 하지 말라는 것도 없었고 통금시간이나 성적 압박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방목주의형 부모님이었다. 그리고 평생 자신들을 희생하며 자식을을 위해 사시는 분이셨다. 존경스럽다.

- 엠제이 드마코, 로버트 기요사키 > 자산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 노동자가 아닌 생산자로 살아가라는...

- 엄마, 아빠, 이연님, 이진선님, 드로우앤드류, 김유진 변호사님, 엠제이드마코, 로버트기요사키, 

 

03) 성장

- 책 3권. 부의 추월차선,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사수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타이탄의 도구들

- 영화를 잘 안봐서... 기억 나는 것은 소스코드.

- 3개월 이상 지속했던 취미 혹은 관심사. 그림 그리기, 중국어, 영어, 독서, 글쓰기, 루틴, 모닝루틴

-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 메시지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 남이 만든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04) 나의 일

- 지금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 창의성이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 이런 생각들도 의미없는 일을 반복하는 회사를 다녔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것을 보면 나쁜 경험이 꼭 나쁜 것은 아닌 것 같다. 충분히 반면교사로 삼아 성장할 수 있는 경험이다.

- 지금 하는 일을 하기 위해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쳤냐. > 졸업을 하고도 전공을 살릴지 말지 고민이 많았다. 결국 살리지 않기도 했다. 광고 분야는 활발해야하고 의견이 쎄야 했지만 나는 절대 못할 것 같았기 떄문이다. 창의성은 있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했고 디자인 과정이 계속 눈에 밟혀서 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저녁에 학원을 계속 다니고 계약 종료 후에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취업을 했다. 편집디자인양성과정 + 아트웍 + 포폴

- 의미있는 성과를 냈던 순간. 사실 최근인 것 같다. 3D 모델링을 스스로 학습해서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고 여기저기 붙였다. 진행한 플로우에서 500% 매출 성과를 달성했다. 연봉도 올랐고, 회사에서는 최대한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었고, 개인적으로 이미지를 판매하는 기술도 배우고, 전공이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에는 부족했지만 최근에는 성과를 공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서 회사에서 아직 배울 것이 있다. 확장성이 뛰어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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