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야나/뱉고 쓰고 맛보고 배우고

생각의 경계를 넘어서

by 점점이녕 2025. 1. 4.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에스키모인들에게 눈은 50가지가 넘는 단어로 표현된다. 각 단어는 눈의 상태와 질감, 그리고 환경과의 상호작용 방식을 세세히 담아낸다. 반면 많은 사람들에게 눈은 “눈”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정의된다. 이 차이는 단순히 어휘의 다양성 문제를 넘어 자연을 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를 드러낸다. 같은 겨울 풍경도 어떤 이들에게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고유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단지 하얀 배경으로 인식될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라고 말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의 경험과 사고를 규정짓는 틀이 된다. 언어는 단순히 현실을 묘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보고 이해하며, 무엇을 놓치는지를 결정짓는다. 따라서 사용하는 단어들이 곧 우리의 세계를 구성한다면 언어를 확장하고 새롭게 바라보는 일은 곧 우리의 삶과 세계를 넓히는 중요한 작업일 것이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언어를 빌려 세상과 소통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세상을 얼마나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라는 명제를 통하여 언어가 우리의 경험을 어떻게 제한하고 동시에 가능성을 열어주는지를 보여준다. 가령 “빨강”이라는 단어는 특정한 색을 가리키지만, 그 색이 주는 미묘한 차이와 개인적인 감각의 깊이는 언어로 완벽히 전달될 수 없다. 단어가 색을 정의할 수는 있어도 그 빛깔이 주는 강렬한 느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언어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사고와 감각을 연결하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세계의 경계를 형성한다.

 

언어의 한계를 확장하는 것은 단순히 표현의 다양성을 넘어 인간 경험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어떤 단어를 배우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언어가 사고를 확장하는 도구로 작용한다고 본 것이다. 예를 들어 “블랙홀”이라는 단어는 과학적 개념을 넘어 우리가 우주의 신비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블랙홀이라는 개념을 알기 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시공간의 왜곡이나 극한의 물리적 상태가 이 단어를 통해 우리의 사고에 구체적인 이미지와 의미로 자리 잡는다.

 

또 다른 예로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라는 용어를 생각해보면, 단순히 기후의 변화의 관련된 과학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든다. 과거에는 단순히 날씨 변화로 치부되던 현상들이 지구온난화라는 개념을 통하여 전 지구적 문제로 재구성되었다. 이 단어는 우리의 일상 행동, 정책, 그리고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새롭게 정의하는데 기여하고 개인과 사회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했다.

 

생각의 경계를 넘어서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는 언어가 우리 사고를 지배하는 틀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지, 어떻게 생각할지와 같은 사고와 인식이 언어를 통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책임(Responsibility)’ 라는 단어는 단순히 의무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 개인의 행동과 결과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맥락을 포함한다. 이러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행동과 그 결과 사이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 개념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없다면, 책임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거나 논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와비사비’ 개념은 불완전함과 덧없음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철학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단순히 ‘아름다움’이나 ‘불완전함’과 같은 단어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와비사비는 특정한 미학적 태도와 감각을 포괄하며, 일본 문화와의 깊은 연결속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언어가 사고의 가능성을 열어주면서도, 때로는 특정 문화적 맥락 안에서만 그 본질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면 기존 언어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표현 방식이 필요하다. 이는 예술, 철학, 과학과 같은 창조적 분야에서 특히 중요하다. 시인은 낡고 익숙한 언어의 틀을 깨뜨리고 비유와 이미지를 통해 독자에게 새로운 감각과 사유의 길을 제시한다. 단어가 재조합되고 새로운 맥락 속에 놓일 때, 우리는 이전에는 접근하지 못했던 감정과 아이디어에 도달한다. 철학자는 기존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유를 담기 위해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다. ‘존재’, ‘의식’, ‘현상학’과 같은 단어들은 단순한 용어를 넘어, 그 시대를 정의하고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도구가 된다.

 

그렇다면 언어의 한계는 제약인가, 가능성인가? 이 모순 속에서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단어와 개념을 학습하며 창조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결국 언어는 우리를 가두는 벽이자, 그 벽 너머로 이끄는 문이다.

 

 

언어 상대성 가설 : 우리의 사고를 조형하는 언어

 

언어는 단순히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구성하고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을 형성한다. 언어 상대성 가설은 바로 이 점을 철저히 파고든다. 에드워드 사피어와 벤저민 리 워프는 언어가 현실을 단순히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언어는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까지 규정한다.

 

색채와 언어: 언어가 감각을 변화시키는 방식

색은 단순히 시각적인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세분화되고 체계화 된다. 한국어에서는 일상적으로 ‘파란색’이라는 단어 하나로 짙은 파란색부터 밝은 하늘색까지를 포괄적으로 표현하곤 한다. 반면 영어에서는 파란색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여러 단어를 사용한다. ‘blue(파란색)’, ‘light blue(밝은 파란색)’, ‘sky blue(하늘색)’, ‘navy(진한 남색)’, ‘teal(청록색)’, ‘turquoise(옥색)’ 등의 단어가 각각의 색감을 나타낸다.

 

이 차이는 단순히 어휘의 다양성 문제가 아니다. 특정 색감을 독립적으로 명명하고 구별하는 데 익숙한 언어 사용자들은 색의 미묘한 차이를 더욱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이는 감각적 경험뿐만 아니라 사고의 세분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즉 세상을 더 정교하고 다채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단어와 표현을 배우는 것은 우리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방향의 언어: 공간을 재구성하는 방식

언어는 세상 우리가 공간을 이해하고 움직이는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영어는 ‘왼쪽(Left)’와 오른쪽(Right)’ 같은 상대적인 방향을 사용하는 반면, 일부 원주민 언어에서는 ‘북’, ‘남’, ‘동’, ‘서’와 같은 절대적 방향 개념을 사용한다. 절대적 방향 개념의 언어를 사용하는 원주민들에게 방향은 단순한 좌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있는 위치와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하며, 이는 그들의 공간적 사고를 강력하게 형성한다.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상대적 방향을 사용하는 언어 사용자들보다 절대적 방향을 사용하는 언어 사용자들이 더 뛰어난 방향 감각을 보았다. 이는 언어가 단순히 공간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공간적 사고를 구성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간의 언어: 선형적 사고 vs. 순환적 사고

시간 개념 역시 언어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르게 표현된다. 서구 언어권에서는 시간이 직선적으로 이해된다. ‘시간이 흐른다(Time flows)’나 ‘미래가 다가온다(The future approaches)’와 같은 표현은 시간의 진행을 물리적 움직임에 비유한다. 반면, 호피어와 같은 언어는 시간의 흐름보다 사건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시간의 개념을 순환적이고 비선형적으로 본다.

 

호피어에서 ‘내일’이라는 단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현재 상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를 암시하는 표현이 사용된다. 이러한 언어적 차이는 단순히 표현 방식의 차이를 넘어 문화적 태도와 삶의 철학을 반영한다. 서구적 사고방식에서는 미래를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이 중요시된다면, 호피 문화에서는 현재의 지속성과 상호작용이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시간을 살아가는 태도까지 형성한다.

 

 

삶을 새롭게 조명하기

언어는 단순히 현실을 묘사하거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우리의 경험과 생각을 구성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의 범위를 설정한다. 그러나 그 경계는 닫혀있지 않다. 새로운 단어를 배우거나 기존의 표현을 재구성하여 언어의 경계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끊임없이 확장할 수 있다. 새로운 단어와 표현은 낯선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고 세상과의 접촉면을 넓히고 깊게 만든다. 그렇게 더 풍부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새로운 단어와 개념을 창조하여 인간의 경험을 확장하듯, 우리도 언어를 재구성하고 확장함으로써 삶과 세상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새로운 단어 하나가 우리의 사고를 변화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삶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결국 언어는 우리를 가두는 경계이기도 하면서, 그 경계를 넘는다면 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세계로 삶을 확장할 수 있는 초대장이다. 이 초대장을 받아들이는 순간 더 넓고 더 정교한 삶의 가능성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