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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나/뱉고 쓰고 맛보고 배우고

불완전한 행복

by 점점이녕 2025. 1. 25.

행복 파헤치기

행복한 삶과 행복하지 않은 삶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대부분 주저 없이 행복한 삶을 원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행복이란 무엇이고, 현재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물어본다면 수월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묘해진다.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 단순히 기쁘고 만족스러운 상태를 의미할까, 아니면 자아실현과 삶을 관통하는 깊은 의미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는 행복한 삶의 추구를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을 정의하고 실현하는 데 평생을 헤매는 것 같다. 도대체 행복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설명하기 난해하고 확실히 행복하다고 당당하게 말하기 어려운 것일까.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면, 확실히 몇 년 전의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나름 행복한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사이에 엄청난 성취를 달성했다거나 벼락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질적 환경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비슷한 집에서 살고 있고, 같은 회사에서 같은 직무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인간관계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고, 겁도 많고 걱정도 많다. 하지만 변한 것이 있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다. 달라진 것은 별로 없지만, 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갑자기 자고 일어났더니 불행한 사람에서 행복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그사이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 같다. 괜찮은 날들과 괜찮지 않은 날들을 오래 반복하면서 서서히 바뀌어갔다. 행복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행복을 목표나 성취로 생각하거나, 긍정적인 감정의 상태의 지속으로 바라보았다. 목표를 설정하고 무언가 이루었을 때는 기분이 좋았고 이게 행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고 어느 시점에서는 공허함이 느껴졌다. 행복이 이렇게 허무한 것이었나. 그렇게 사라진 행복을 찾아서 또 새로운 기준을 세우고 다시 달려갔다가 길을 잃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실패도 있었고, 방황과 불안도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면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행복한 삶은 항상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다 어느 순간 행복을 불완전한 삶의 여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삶은 조금 더 단순하고 명료해졌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슬픔과 고통, 두려움도 살아가면서 당연히 느껴야 하는 감정과 경험임을 받아들이면서 심리적인 자유를 얻었다. 굳이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역설적으로 비로소 행복한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굳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내가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그게 행복한 삶이 아니고 무엇일까.

 

물론 앞으로 살아가면서 또 다른 경험과 생각들이 새로운 나를 만들어갈 수도 있지만, 지금 시점에서 내가 나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깊이 이해해 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꼭 필요한 삶의 여정일 것이다. 행복은 결코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탐구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그 과정에서 기쁨도 있겠지만 슬픔도 있을 것이라는, 그러나 피할 수 없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약간은 두루뭉술한 그 불완전한 행복의 느낌을 나름의 언어로 정리해 본다면 스스로를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행복하기 어려운 이유

부실한 개인과 사회적 영향력

행복하지 않았던 시기를 되돌아보면, 표면적으로 부족함은 없어 보였다. 일도 열심히 했고, 성취감도 느꼈고, 돈도 부족하지 않게 벌었고, 가족들과 내 건강에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듯한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뭔가 부족한 것 같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나은 삶은 무엇인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동기부여 콘텐츠로 일시적인 수혈을 받고 다시 무기력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반복됐다.

 

행복하지 않았던 이유에는 복합적인 것들이 영향을 주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 행복과 삶의 기준을 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행복’은 너무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었기에,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은 있었지만 그 삶이 어떤 모습인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이룰 수 있는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 속에서 누군가 잘사는 방법을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 영원히 이런 불확실하고 막연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버겁기도 했던 것 같다.

 

행복을 정의하지 못하는 문제는 단순히 ‘없음’의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사람은 기준이 없을 때 외부의 가치에 쉽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말한 사회적 비교 이론처럼,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준이 없을 때 타인의 성과나 상태를 비교의 잣대로 삼게 된다. 이러한 비교는 단순한 ‘없음’ 상태가 아니라 ‘오류가 있음’의 상태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행복의 기준을 스스로 설정하지 못하면, 외부에서 주입된 기준이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돈, 지위, 사회적 영향력과 같은 것들이 행복의 조건으로 자리 잡게 된다. 물론 이와 같은 것들도 개인적으로 중요한 기준일 수 있지만, 정말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하여 설정한 기준과 그저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따르는 기준은 삶의 방향에 있어 전혀 다른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외부 기준에 따라 행복을 판단하고 타인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행복은 더 멀어지는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와 SNS는 특정한 행복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강화한다. ‘행복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화려한 여행, 성공적인 커리어, 뛰어난 외모, 좋은 집과 자동차와 같은 모습으로 도배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왜곡된 현실은 개인의 평범한 일상과 극명하게 대비되고, 우리는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비교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긍정적으로 활용한다면 목표를 설정하고 발전의 동기를 제공할 수 있지만, 자기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면 비교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부정하게 만드는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행복(어쩌면 꾸며진)과 자신의 부족함을 비교하며 결핍을 키우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이다.

 

사람은 오감 중 시각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듯하다. 행복을 판단할 때도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지나치게 의존하곤 한다.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인 요소다. 연봉, 집의 크기, 소유한 물건들, 화려한 경험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많을수록 잘 살고 있다고 느끼기 쉽다.

 

그렇다면 물질적인 성취가 정말로 행복을 가져다줄까. 그래도 열심히 일하면서 금전적으로 나름의 성취를 이루었지만, 여전히 행복하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물질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돈은 살아감에 있어 정말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나름 사회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쫓아보았지만 여전히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물질적인 성취와 사회적 기준이 나에게는 행복한 삶을 위한 좋은 기준이 아님은 확실했다.

 

 

생물학적 요인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외향적인 사람들은 내향적인 사람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높은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통하여 에너지를 얻고, 사회적 연결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과거에 집단을 형성해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던 환경에서 비롯된 유전적 특성이라고 한다.

 

만약 이런 설명이 절대적이라면 나는 유전적으로 행복하기 힘든 사람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렇게 느꼈던 적도 많다. 내향적인 성격 탓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했고 회피했다. 걱정과 두려움이 많아 새로운 도전보다는 익숙한 환경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사회적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스스로 구성한 굴레에서 만들어진 무미건조한 삶과 주변의 활기찬 일상을 비교하며 더 땅굴을 파고들어 갔다.

 

즐거움과 만족에 대한 기준은 너무 높았고, 불확실성에는 지나치게 민감했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웃고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나는 왜 좋아하는 것도, 재미있는 것도 없을까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행복은 마치 나와는 거리가 먼 삶처럼 느껴졌다. 유전과 진화론적인 설명에 따르면 겁이 많은 내향적인 성격으로 태어나는 순간 행복의 기회를 반쯤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군가는 불행하지 않으니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반면에 행복하지 않아서 불행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때로는 억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이런 생각들은 단순히 내 유전적 특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삶은 불공평하고, 어찌 되었든 사람은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행복이 유전과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좌우된다는 과학적 설명은 분명 설득력이 있지만, 그것이 인간 경험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사람은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고, 내면의 태도도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지 않은가.

 

언젠가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외향적인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대체로 행복하지만 너무 사람들에게 휘둘려서 자기의 삶이 없어진 것 같아 회의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자기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더 가져보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각자 나름의 가치와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반대로 나는 개인주의 성향이라 앞으로 타인에게 더 관심을 가져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말했다). 내향적인 성격이라고 반드시 불행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과거를 돌아봐도 수많은 선택을 통하여 현재의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유전적 요소가 삶의 일부를 좌우하더라도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타고난 것에 매몰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걱정과 두려움, 예민함, 과한 의미 추구, 생각이 많은 특성들이 충분히 내 강점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름 나만의 의미 있는 삶을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부족하게 느끼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할 것이다.

 

 


나름의 행복을 찾아서

행복하지 않을 자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강박은 오랜 시간 나를 지배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할 때마다 불안과 허탈함은 가중됐다. 의미 없이 살아가는 삶은 불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삶에 어떻게 객관적이고 단일한 의미나 진리가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삶의 방식이 다르듯, 행복도 고정된 정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에서야 비로소 의미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행복의 진리를 찾으려는 태도를 내려놓으면서 삶이 달라졌다. 없는 답을 찾으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대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기준을 만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삶은 의미가 없다”라거나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당황스러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이 해방감을 주었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정의하는 것이고, 행복 역시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삶에 의미가 없다는 말이 무기력하게 산다거나, 행복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외부에서 주입된 기준이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기준을 세워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다.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정답을 찾으려 하며 불필요한 시간과 감정을 낭비했던 것 같다. 하지만 꼭 필요한 방황의 시간이긴 했다. 의미를 추구했기 때문에 의미의 부재를 인정할 수 있었고, 스스로 의미를 구축하겠다는 태도를 가질 수 있었으므로. 여러모로 필연적으로 겪었어야 했을 과정이었고,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발판이었다.

 

그 이후에는 회사에서도 지나치게 성과에 몰입하기보다는 실패에서도 배울 점을 찾아서 레슨런을 강화해 보았고, 주변 동료들로 인한 사회성의 향상에 감사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배운 목표 설정이나 고객 경험 설계를 개인의 삶에 적용하여 내적인 성장을 위한 도전도 해보았다. 부족함보다는 이루어낸 것들에 집중해 보면서 회복탄력성을 키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행복감은 그렇게 발견되었다.

 

 

부조리와 함께하는 행복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자연스럽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불행과 고통, 슬픔과 좌절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긍정만을 추구하며 부정적인 감정을 외면하면 점점 더 그러한 감정에 취약해질 수 있다. 부정이 금기시되다 보면 필연적으로 심리적 억압과 스트레스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불안감과 걱정이 많은 성향은 과도한 긍정 추구를 할 경우 더욱 독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은 긍정과 부정이 함께 작동하는 여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니체는 부조리를 수용하고 사랑하는 태도를 ‘아모르 파티(운명에 대한 사랑)’로 이야기했다. 더 깊은 의미가 있겠지만, 표면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직은 고통을 사랑하는 것까지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피할 수 없다면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하고 싶다.

 

첫 번째는 긍정적 내러티브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가령 힘든 상황에 처한다면 불만만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나를 성장 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과거만 돌아보아도 삶이 무기력했을 때 정신적으로 힘들었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내 삶의 의미를 만들기 위하여 치열하게 고민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 업무가 많다면 다양한 일을 하면서 전문성을 쌓을 수 있고, 사내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도 있다. 걱정이 많은 성격은 더 많은 대비를 하고 필요한 것을 갖추는 것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렇게 긍정적 내러티브는 부정도 새로운 창조와 성취로 전환할 수 있다. (부정이라고 적었지만 사실 인간은 주관적으로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객관적인 부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결핍은 분명히 불편하고 괴로운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결핍이 변화를 추구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현재의 삶이 안정적이고 항상 행복하다면 더 나아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현실 안주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지만 인간은 본래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변화 욕구도 피할 수 없다면 불편한 가시방석 속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나올 필요는 있지 않을까. 불편을 느낄 때마다 어떻게든 배울 점을 찾아서 성장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두 번째는 부정을 온전하게 수용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겠지만, 이러한 시도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며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아서 심리적으로 안정적이게 보일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정말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통, 슬픔, 불안, 분노와 같은 감정이 없는 것이 얼핏 보면 행복한 삶처럼 느껴지지만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웃고 있는 것은 징그럽기만 하고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울어야 할 때는 울고,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걱정을 하는 것이 사실은 당연한 인간의 삶이 아닐까.

 

 

느리게 사는 행복

빠른 속도의 부작용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빠르게 돌아가며 속도를 강요한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하며, 더 빠르게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은 우리의 일상이 된 것 같다. 이 속도감은 생산성과 성취를 높이는 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종종 행복으로 이끄는 대신 탈진과 불안으로 내모는 것 같기도 하다. 속도에만 몰두하다 보면 삶의 작은 순간들을 음미할 여유조차 사라지기에 내면의 만족감은 그 과정에서 희생될 수 있다.

 

여행을 예로 들자면 많은 장소를 방문하고 수많은 사진을 찍으며 다양한 경험을 채운다. 그러나 정작 그 여행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스쳐 지나간 풍경과 사람들 속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했는지는 모호하다. 결과물로 남는 사진이나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한 나머지 여행의 본질적인 즐거움과 배움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속도가 삶을 지배할 때 행복은 종종 뒤로 밀려난다. 빠르게 목표를 달성하고 성취를 이루는 순간에는 만족감이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만족은 짧고 일시적이다. 성취를 이루자마자 곧 다음 목표를 위해 달리기 시작한다. 마치 끝없는 경주처럼 느껴지는 이 과정에서 행복은 그다음 단계로 미뤄지는 경우가 많다. ‘다음에 더 나아지면 행복할 수 있을 거야’라는 믿음 속에서 현재의 소소한 만족을 무시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피로와 번아웃 속에서 점점 행복으로부터 멀어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빠르게 달리는 삶 속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시간은 종종 낭비처럼 여겨진다. 멈추는 시간을 일종의 실패나 무의미한 시간으로 착각하곤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휴식조차 죄책감을 동반하게 만든다. 주말에 단순히 침대에 누워 쉬고 있을 때조차 ‘이 시간에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뭔가 더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후회가 들기 쉽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정작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이렇게 멈춤을 생산성의 부재로 간주하면 끝없이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이 심해지고 삶을 더욱 피로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다.

 

느린 속도에서 발견하는 의미

느린 삶은 게으름을 합리화하거나 단순히 속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더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을 이루고자 하는 압박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의미 있는 활동에 시간을 할애하고 삶의 작은 순간들을 음미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지금 달려 나가는 속도가 나의 속도였는지, 사회의 속도였는지 고민해 보고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빠르게 배달 음식을 주문하는 대신 직접 재료를 손질하며 요리를 해보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시간이 될 수 있다. 결과물이 맛이 없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출근길이어도 그날의 날씨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풍경의 변화를 느끼는 것은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특별한 경험으로 전환 시킬 수 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대화를 천천히 나누고 상대방의 이야기와 그 시간의 감정에 집중해 본다면 같은 사람을 만나도 새로운 경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느린 속도로 사는 것은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태도를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성취를 요구하고, 쉴 때조차 그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준다. 하지만 쉼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라 재충전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정신적인 안정을 유지하며, 다시 나아갈 동력을 얻는 중요한 과정이다. 천천히 걸어가야 하는 시간, 때로는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아야 하는 시간의 중요성을 스스로 잘 느끼고 나만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바뀌기는 힘들 테니 의도적으로 낭비하는 시간을 목표로 삼고 그 시간에 느낀 것을 기록해 보는 습관을 들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가령 근처 공원에서 의미 없이 1시간 배회하기…)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느리게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삶의 속도는 특정한 방향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빠름과 느림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빠르게 몰입하고 성취하는 시간과 느리게 음미하며 회복하는 시간이 공존해야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결국 느린 속도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경험하며, 무엇에 가치를 둘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만의 삶의 리듬을 만들고, 자기의 속도에 맞는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시간 속에서의 행복

행복은 순간의 쾌락에서 비롯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의할 때 더 의미가 깊은 것 같다. 때로는 과거를 회상하며 행복을 느끼고, 현재의 순간에서 만족을 느끼고, 미래의 기대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며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의 차원에서 행복이 작동하는 것 같기에 행복은 순간이 아닌 삶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문제는 이 세 가지 시간 축이 늘 조화롭지는 않다는 것이다. 과거에 지나치게 매달리거나, 현재를 무시하거나, 미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행복은 흐려질 수 있다.

 

과거

과거에 매달린다는 것은 나를 후회와 미련이라는 덫에 가두는 행위다. 과거의 실수나 아쉬움을 곱씹으며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을 차단하게 된다. 반대로 행복했던 순간만을 떠올리며 ‘그때가 정말 행복했다’라고 느낄 때, 현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이렇게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를 잠식하도록 두는 것은 오히려 자기를 소모시키고 정체시킬 수 있다.

 

과거는 단순히 기억의 저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며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중요한 배움의 원천이다. 과거의 상처와 실패는 고통스러운 경험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성장하고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숨어 있다. 따라서 고통을 회피하거나 좋은 것만 기억하는 대신 그 안에서 배움과 의미를 찾을 때 현재와 미래의 자신을 더 단단히 세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과거에는 너무 일에 매몰되거나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경향이 강했다. 두려움이 커서 많은 도전을 하지 못해 절대적인 경험의 총량이 적기도 하다. 그래서 앞으로는 스스로를 탐구하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가지며 올곧게 서기 위하여 노력하기로 했고, 두려움과 함께 새로운 도전과 경험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과거의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과거의 내가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기 때문에 마음에 들기도 한다.

 

미래

현재를 무시하고 미래만을 바라보는 것도 문제다. 종종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현재를 희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현재의 순간들이 단지 미래로 가는 다리로 전락해 버리고, 막상 그 미래가 찾아왔을 때조차 만족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목표를 이루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려온 것일까 의문을 갖는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므로. 미래의 목표와 꿈은 방향성 측면에서 중요하지만, 그것이 현재를 완전히 잊게 한다면 진정 원하는 행복과는 멀어질 수 있다.

 

미래는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제공한다. 사람은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설정하며 더 나은 내가 되기를 바라며, 이는 삶에 방향성을 부여한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단순히 행복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행동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한다. 미래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오늘을 살아가는 동력으로 삼는 태도가 중요하다. 미래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현재

현재는 시간의 흐름에서 가장 강렬하게 경험되는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순간적인 쾌락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과거와 미래의 가치를 간과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현재를 제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의 감각과 감정을 온전히 느끼면서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여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내 삶의 비전은 꾸준히 성장하고 타인의 성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지금 글을 쓰는 시간도 꽤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답답함이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구체적으로 적어 보며 스스로 납득해 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삶의 방향을 더 뚜렷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지금의 생각들이 현재가 된 미래의 나에게 또 다른 결정의 발판을 제공해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고로, 지금의 시간은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현재에 충실히 존재하는 태도는 행복의 깊이를 더해줄 수 있다. 과거와 미래를 과도하게 염려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소소한 즐거움을 음미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이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아마 현재에 충실한 태도는 한순간에 만들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사소한 순간에도 만족과 감사를 표현해 보거나, 단순하고 일상적인 행동이어도 의미를 부여해 보면서 어떻게 하면 가치 있게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면 그저 현재를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친절한 한마디, 우연한 만남, 타인들의 살아가는 방식 탐구, 찬 바람, 따뜻한 바람, 가벼운 다리, 무거운 다리, 뚜렷한 정신, 비몽사몽.

 

결국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축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과거는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뿌리가 되고, 현재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토대이며, 미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려준다. 과거로부터 배움을 얻고, 현재의 순간을 음미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내 행복도 내 삶의 시간 속에서 제대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관계 속에서의 행복

요즘은 개인주의가 점점 심화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다. 나도 한때 타인과의 관계를 피하고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자기만 생각하는 삶은 고민할 거리가 줄어 일견 편안해 보이지만 정작 내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단절된 삶이 의미 있는 삶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벽을 만들던 과거의 시간들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러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다르게 살아봐야겠다고 다짐을 할 수 있어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과거였다고 생각한다.

 

두려움과 걱정을 끌어안고 세상에 나와봤을 때(알을 깨고…) 세상에는 따뜻한 사람도 많았고,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동시에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도 많았다. 미디어에서는 인심이 팍팍한 모습들을 많이 접했는데, 한 번은 봉사활동을 갔을 때 수백 명이 모인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꼭두새벽부터 아무런 보상도 없는 활동을 위하여 주말을 반납해서 나온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이 새로운 세상을 접하는 기회였다. 난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중에는 어린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 나이 때 나는 게임만 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반성을 했던 것 같다. 또 다른 모임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들으면서 행동력을 키우고 새로운 시도도 해보며 한층 성장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타인과의 만남은 유익했다. 스스로 성장하는 것과 타인을 통하여 성장하는 것은 서로 다른 세계의 확장이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단순히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질이 중요하다. 그저 만남이 있다고 하여 모든 관계가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상생할 수 있는 관계, 즉 서로의 성장을 돕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관계는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가능하다.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각자의 방향성을 지지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단순한 연결을 넘어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하고, 함께하는 삶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자기만의 건전한 관계 철학이 있어야 하며 스스로 올곧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자기만 생각하거나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는 건강한 관계를 방해한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소유와 존재의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상대를 소유하거나 지배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하고 함께 성장하려는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만약 자기만의 기준이 없다면 타인의 삶에 쉽게 휘둘리게 되고, 반대로 자기 기준만 고집한다면 타인의 삶을 쉽게 재단하게 되기 때문에 이는 관계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불안정하기 쉽다.

 

앞으로의 관계 철학이라고 한다면, 만나게 되는 인연에서 많은 것들을 접하고 배우려고 노력하고 싶다. 다만 방향성이 다르다면 그 자체로 존중하겠지만, 흔들리고 싶지는 않다. 사실 앞으로는 그렇게 흔들릴 것 같지 않지만, 만약 흔들리는 일이 생긴다면 스스로 그 항목에 대한 기준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일 테니 새로운 방향성에 대한 탐구를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기준은 있되 아집이 되지 않도록. 한편, 내가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영향에도 신경을 쓰고 싶다. 특별한 것은 아니고 그저 작은 말 한마디, 친절한 행동, 공감하는 태도, 소소한 선물 등. 가능하면 그 시간에 의미 부여해 본다면 또 다른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관계란 단순히 나와 타인 간의 연결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관계 속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을 치유하고,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함께 성장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 그런 관계를 구축하는 것도 행복한 삶의 과정일 것이다.

 

 


그래도 정의해보기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막연하고 복합적인 개념처럼 느껴진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기 때문에 구구절절 원하는 삶의 방식을 나열해 보았다. 그래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수많은 존재들이 답하려고 시도했지만 그 누구도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정의를 내지는 못한 것 같다. 어쩌면 이 답을 찾지 못한 상태가 행복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정된 답이나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불완전한 삶 속에서 계속해서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

 

서은국 교수님은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을 ‘아이스크림’이라고 표현했다. 아이스크림은 입안에 있을 때 잠시 달콤한 만족감을 주지만 금세 녹아 사라진다. 이처럼 일시적이고 소멸적인 본질로서 행복을 정의하려고 한 것이다. 행복도 지속적인 상태라기보다는 특정 순간에 느껴지는 감정이며,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설명하며. 그리고 행복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처럼 단순한 일상의 즐거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사실 나의 행복 가치관으로 삼고 싶지는 않지만, 특정 대상으로 표현하여 아직까지 머리에 남겨두었다는 것 자체로 좋은 정의라고 생각한다.

 

굳이 추상적인 관념을 정의 내려야 할까 의문도 있지만, 그저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무언가를 이해하고 스스로 납득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공감을 조성하는 데에 있어 영향력이 다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나만의 정의를 내려보고 싶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다.

 

언어는 단순히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형성하고, 느끼고, 경험하는 방식을 정의한다고 한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과연 행복을 어떻게 정의했을까. 이처럼 감정을 표현할 단어가 부족하면 그 감정을 인식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행복의 순간을 표현할 단어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이 행복인지조차 자각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라도 나만의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삶을 더 다채롭게 느끼며 살고 싶다.

 

그래서 현재의 결론은 나에게 행복은 ‘불완전함을 안고 다양한 가치를 쌓으며 나답게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하겠다. 비유할 대상을 고민해 보았지만 아직은 떠오르는 것이 없다. 더 마음에 드는 정의는 미래의 나에게 맡기기로. 중요한 것은 순간이 아닌 여정이다.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때로는 그렇다고, 때로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또한 죽기 전에 삶을 회고해 본다면 나름 행복하게 살았다고 답할 것 같다. 현재의 내가 그런 삶을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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