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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나/뱉고 쓰고 맛보고 배우고

무감각을 넘어 의미 있는 여행으로

by 점점이녕 2025. 1. 3.

 

여행은 우리 삶의 중요한 과정으로 여겨진다. 새로운 공간과 낯선 환경은 많은 이들에게 일상을 벗어나 자신을 재발견하는 기회로 작용한다. 그러나 나는 여행에 대해 미묘한 거리감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은 여행이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낯선 환경에서의 불편함과 여행 후 희미하게 남는 기억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경험이 더 많았다. 새로운 풍경은 일순간 마음을 사로잡지만, 곧 피로와 낯섦이 밀려온다. 돌아오면 남는 건 몇 장의 사진과 희미한 기억 뿐이다. ‘나는 왜 이토록 여행에 무감각할까’라는 의문은 조금씩 깊어지며 결국 근본적인 질문에 다다랐다.

 

만약 죽음을 앞둔 순간 여행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면 그 후회는 무엇을 의미할까. 낯선 땅을 밟지 못한 발걸음에 대한 아쉬움일까, 아니면 충분히 삶의 가능성을 탐구하지 못했다는 자각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한 여행을 넘어 내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지는 다시금 묻게 한다.

 

여행의 무감각에 대한 이유

프로이트 : 무의식과 초자아의 병렬적 문제

여행 중 감흥의 부재를 이해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라는 세 요소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된다. 이 중 무의식적인 원초아와 초자아는 종종 긴장을 야기하며, 이러한 긴장은 여행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무의식과 안정 욕구

무의식은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쾌락과 안정을 추구하는 원초아의 영역이다. 여행은 본질적으로 낯선 환경과 예상치 못한 상황을 동반한다. 이는 무의식의 안정 욕구와 충돌한다. 예를 들어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거나 예기치 않은 문화적 차이에 작면했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불안과 혼란을 느낀다.

 

이러한 불안은 무의식이 안정적 환경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일상에서는 평온하게 유지되던 심리적 균형이 여행 중에는 쉽게 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낯선 환경은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방어적이고 회피적인 태도로 몰아넣으며, 여행의 즐거움과 감흥을 방해한다.

 

초자아와 성과 압박

한편, 초자아는 사회적 이상과 도덕적 기준을 내면화한 정신의 영역이다. 초자아는 여행을 단순한 휴식이나 탐험의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된 ‘이상적인 경험’으로 격상시킨다. 소셜 미디어에 공유할 완벽한 사진, 특정 명소 방문의 성취감, 그리고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는 기대는 모두 초자아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압력의 결과다.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기보다는 사진을 찍는 데 몰두하거나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특정 명소를 방문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초자아는 이러한 사회적 기준을 내면화하여 개인에게 ‘이런 경험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적 욕구를 부여한다. 그러나 현실은 종종 초자아의 이상적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이는 여행 중 실망과 무의미함을 느끼게 만든다.

 

무의식과 초자아의 병렬적 갈등

무의식의 안정 욕구과 초자아의 성과 압박은 서로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병렬적으로 긴장을 형성하며 개인의 심리와 감정을 복잡하게 만든다. 낯선 환경에서 불안을 느끼는 동시에, 초자아가 부과하는 “완벽한 여행”이라는 이상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 개인은 이중의 스트레스를 경험하며 불안을 증폭시킨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초자아가 부여하는 이상적 기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무의식이 제기하는 인정 욕구를 자각하며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에리히 프롬 : 소유와 존재

에리히 프롬의 ‘소유 모드’와 ‘존재 모드’ 개념도 여행 경험을 깊이 성찰하는 데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 프롬은 현대 사회가 소유를 통해 삶의 가치를 정의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소유 중심의 태도가 여행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보았다.

 

소유 모드와 여행의 상품화

프롬에 따르면 소유 모드는 외부적인 사물과 경험을 소유함으로써 행복과 안정감을 얻으려는 태도다. 여행에서는 특정 명소를 방문하거나 사진을 찍어 소셜 미디어에 공유하는 행위가 대표적인 소유적 태도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여행은 내면적 경험이 아니라 소비 가능한 상품으로 전락한다. 유명한 명소에서 사진을 찍고 곧바로 떠나는 관광은 여행의 본질을 깊이 음미하기보다는 외부적 성취를 과시하려는 소유 중심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소유 모드의 여행은 결과적으로 피상적인 감각적 즐거움에 머물며 개인의 내면적 충족을 방해한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여행 경험을 공유하며 타인의 반응을 확인하는 행위는 자신의 소유한 경험을 증명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이러한 태도는 여행을 일종의 성과로 규정하고 진정한 만족감을 얻지 못하게 만든다.

 

존재 모드와 여행의 본질적 가치

반면 존재 모드는 외부적 성과와 소유를 넘어 순간의 경험과 내면의 충족을 중시하는 태도다. 존재 모드에서 여행은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자기 성찰과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여정으로 변화한다. 예컨대, 현지 주민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삶을 이해하거나 특정 장소에서의 고요한 사색을 통해 내면을 돌아보는 경험은 존재 모드의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존재 중심의 여행은 외부적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현재 순간에 몰입하며 여행 자체를 즐길 수 있게 한다. 이는 경험의 깊이를 더하며, 내면적 성장과 지속적인 기억으로 이어진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며 그 문화와 관습에 천천히 스며드는 느린 여행(Slow Treval)은 이러한 존재 모드의 좋은 예다.

 

여행의 의미 재정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후회와 삶의 본질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후회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작품이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의 생애는 표면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사회적 지위와 물리적 안정, 그리고 적당한 가족 관계까지 그는 당대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순간, 그는 자신의 삶이 허무하다는 깊은 후회에 빠진다.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질문,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았는가?”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

 

여행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는 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행의 부재에 대한 후회는 단순히 특정 장소를 방문하지 않은 데서 오는 아쉬움이 아니라, 미지의 가능성을 탐구하지 않았던 선택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여행은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새롭게 구성하고 본질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이 사회적 성과로만 평가되거나 소유 중심적 태도로 소비된다면, 이반 일리치의 삶처럼 표면적 풍요 속에서도 본질적 가치를 상실할 수 있다.

 

베르그손 : 지속과 기억 이론

앙리 베르그손은 시간을 단순히 순간의 연속으로 보지 않고 기억을 통해 현재와 과거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흐름으로 보았다. 인간의 삶을 연속적이고 유기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이해한 것이다. 지속은 단순한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는 다르다. 이는 기억과 경험이 축적되어 우리 존재의 본질을 형성하는 심리적 시간이다. 여행은 이 지속 속에서 단순한 일시적 쾌락이라 순간적 활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감각으로 우리의 정체성에 깊이 새겨진다. 우리의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내면에 흔적을 남기고, 삶의 일부로 지속된다.

 

어린 시절 가족과 떠났던 바닷가 여행의 기억은 한때의 사건이 아니다. 그 바닷바람의 냄새, 파도의 소리, 모래의 감촉은 나의 현재 경험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내가 자연 속에서 느끼는 안락함과 연결된다. 이러한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형성하는 중요한 축이 된다. 여행은 그러한 지속 속에서 일시적 사건을 넘어 삶의 서사적 맥락을 풍요롭게 한다.

 

여행하지 않은 삶, 기억의 공백

베르그손의 지속과 기억 이론은 우리가 여행하지 않는 삶에서 놓치는 것을 조명한다. 여행하지 않는 선택은 특정한 장소를 방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기억의 공백을 남기는 선택이다. 이러한 공백은 우리가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가능성을 제한하며, 정체성을 형성하는 서사의 빈틈으로 작용할 수 있다.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예상치 못한 풍경에서 느낀 감동은 우리의 삶을 확장하고 기억의 지속 속에 새로운 색을 더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놓친다면 우리의 지속 속에는 그러한 확장의 흔적이 남지 않게 된다. 이는 삶의 서사에서 중요한 장면을 생략한 것과 같아서 삶의 깊이와 의미를 제한할 수 있다.

 

죽음의 순간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후회하는지는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드러낸다. 베르그손의 관점에서 죽음을 앞둔 우리는 우리의 지속 속에 남아 있는 기억들을 되돌아본다. 여행은 이러한 기억의 흔적을 형성하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다. 단순히 새로운 장소를 방문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느낀 감정과 배운 교훈, 그리고 만난 사람들과의 교류가 우리의 지속 속에 남아 삶의 가치를 풍요롭게 만든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일상에서의 안정과 예측 가능성을 누렸던 시간을 돌아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대신, 새로운 경험과 도전에 맞섰던 기억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은 성찰과 깨달음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여행, 삶의 본질과 연결되는 여정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거나 이국적인 풍경에 감탄하는 행위가 여행은 아니다. 여행이 주는 기회는 우리 삶의 지평을 넓히고, 내면에 숨어 있던 목소리를 깨우는 경험이다. 무의식적 안정 욕구와 초자아의 압박, 소유 중심의 사고 방식은 여행을 단순히 외부의 성과로 축소시킬 위험이 있다. 그러나 여행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그러한 외적 조건들을 넘어선다.

 

여행을 통하여 우리는 삶의 이야기에 중요한 장면들을 추가해야 한다. 낯선 곳에서의 순간들은 단순한 즐거움으로 끝나지 않고,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우리가 후회하는 것은 단지 여행하지 못한 장소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삶의 가능성과 자신과의 대화일 것이다.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계기,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에 균열을 내는 힘. 여행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무감각을 넘어 삶의 본질과 다시 연결되도록 이끈다. 결국 여행이란 외부 세계를 향한 발걸음이면서 동시에 내면 세계로의 귀환이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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