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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나/뱉고 쓰고 맛보고 배우고

살아냈다는 껍데기 남기기

by 점점이녕 2024. 12. 31.

표현과 실재의 간극, 언어와 사고의 불완전함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 행위가 아니다. 글쓰기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그리고 내가 세계 속에서 어떤 존재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고유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늘 쉽지 않다.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경험을 쌓아도 글을 쓰는 순간마다 단어와 문장은 더 가볍고 빈약해 보인다. 생각은 분명 존재하지만, 생각이 언어로 화하는 순간 의미는 흐려지고 흔적은 희미해진다. 머릿속에서 선명했던 것들이 막상 문장으로 나오면 무의미한 낱말의 나열로 느껴진다.

 

이 어려움은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한 피할 수 없는 본질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진 생각, 즉 내면의 실재를 글이라는 외부의 표현으로 옮기는 과정에는 항상 왜곡이 발생한다. 단어는 생각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며, 문장은 생각의 흐름을 온전히 재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글쓰기란 무엇일까. 왜곡과 간극 속에서도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어의 한계와 플라톤의 이데아론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따르면 완전한 실재는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며 우리가 접하는 현실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머릿속의 완전한 생각은 마치 이데아와 같고 언어는 그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생각을 글로 표현하려고 할 때, 이 과정에서 본래의 형태는 희미해지고 종종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언어라는 도구 자체가 불완전하기 떄문일까, 아니면 생각이 본질적으로 언어와 다르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일까.

 

플라톤의 관점에서 언어는 본질적으로 이데아의 완전함을 담아낼 수 없는 불완전한 도구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이데아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한계를 초월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언어를 사용하여 이데아에 가까워지려는 행위 자체가 인간 정신의 창조적 본질을 드러낸다.

 

완벽한 글이라는 개념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플라톤적 관점에서 볼 때 완벽한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글이란 단지 머릿속의 완전한 이데아를 따라잡으려는 불완전한 시도일 뿐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탐구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언어는 완벽함에 도달할 수 없지만 그 한계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와 해석을 창조해낸다.

 

결국 언어와 사고의 간극은 단순히 한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간극 속에서 인간은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며 기존의 사고를 초월하는 창조적 행위를 지속한다. 언어는 이데아의 그림자일지언정, 그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빛을 발견하는 것이 글쓰기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시간과 존재 : 하이데거의 시각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영감을 얻어 생각과 표현의 간극을 시간의 문제로 바라볼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순간 생각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표현하려는 생각과 표현의 행위는 동일한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글쓰기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어긋남이 발생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현존재(Dasein)’라고 불렀다. 현존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그 존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는 존재다. 글쓰기는 어쩌면 이러한 질문의 연장선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어떤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나 자신에게 묻고 답하려는 행위. 하지만 이 행위가 점점 어려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 어긋남은 단순히 기술적 실패가 아니라 시간을 본질적으로 구성하는 ‘존재의 시간성’에서 비롯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현재에 갇힌 실체’로 보지 않고, 과저, 현재, 미래의 연속적 상호 작용 속에서 이해한다. 이를 ‘현존재의 시간성’이라 부르며, 인간의 존재는 과거의 경험, 현재의 행위, 미래를 향한 기대와 불안을 통해 끊임없이 구성된다고 보았다. 글쓰기도 이와 비슷하게 과거에 떠올린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미래의 독자와 소통하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하여 글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시간이 드러나는 장(場)이 된다.

 

글쓰기는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개념과도 연결될 수 있다. 글쓰기를 단지 개인적인 사고의 기록으로 보기보다,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나의 사고는 언어로 외부 세계와 연결되고, 독자는 그 글을 통해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이는 글쓰기가 단순히 자기 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확장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글쓰기를 단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글을 쓰는 동안 생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표현된 언어는 그 순간의 나를 반영한다. 하지만 그 순간은 곧 과거로 흘러가며, 내가 남긴 글은 시간이 지나 독자에게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글쓰기가 단순히 과거를 현재화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고 재발견하는 여정임을 보여준다. 표현하려는 의도와 실제로 쓰여진 단어들 사이의 간극은 시간 속에서 생각과 표현이 따로 움직이는 결과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글쓰기는 완벽한 기록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 흘러가는 생각을 붙잡으려는 일종의 저항이다. 그 저항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글쓰기의 숙명이며, 또한 그 자체로 글쓰기의 본질을 이룬다. 그러나 이 실패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하이데거가 강조했듯, 인간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미완성의 과정이며 그 미완성 속에서 스스로를 창조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미완성의 시간을 체험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자기 발견과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결국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방황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방황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글쓰기는 방황 속에서 나를 찾고,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방황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방황 자체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면 글쓰기가 어려운 것도 내가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을 선택한 이유

내가 선택한 단어와 문장은 내 생각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나의 한계와 무의식을 드러낸다. 이러한 자기 성찰을 통해 글쓰기를 단순한 표현의 도구로 보기보다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행위로 바라볼 수 있다.

 

글쓰기는 완벽한 표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언어의 간극을 탐구하며 그 간극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표현과 실재의 간극은 글쓰기의 한계이자 그 한계 속에서 열리는 창조의 문이다. 그러므로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생각을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실재롤 새롭게 창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글이 어렵다는 것은 나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이며, 내가 오늘은 살아냈다는 증거이고,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선언이다.

 

 

 

 

 


 

브런치 포스팅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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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냈다는 껍데기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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