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는 돈, 집, 차, 여행, 비싼 경험 등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사회인 것 같다. 이런 물질적인 현상이 요즘 들어서 강화되었는지, 예전부터 있어 왔는데 드러낼 공간이 마땅히 않아서 인지되지 못했는지는 모르겠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개개인이 공간과 국가를 떠나서 쉽게 서로의 삶을 접할 수 있게 된 환경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어쩌면 기술이나 매체의 발달로 인하여 사회적인 현상도 더욱 심해졌을 수도 있겠다. 나는 과연 물질적인 삶에서 자유로운가?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 모드는 물질적 소유와 외적 성공을 중시하는 삶의 방식이며, 소유 모드에서는 개인이 물질적 재산과 권력, 명예 등을 통하여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다고 했다. 반면 존재 모드는 내면의 성장과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삶의 방식이며, 자아 실현과 상호 이해와 공감에 기반하여 자신의 가치를 찾는다고 말했다. 물건과 외부적인 환경에 휘둘리는 삶보다는 내면의 기준으로 흔들리지 않는 삶이 멋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내 삶은 과연 소유 중심인가, 존재 중심일까.
자아 성찰과 자아 실현, 내적인 성장, 인간관계의 중요성, 삶의 비전 등 진정한 삶을 생각했을 때 반드시 따라오는 항목들이다. 좋다는 것은 알지만 오로지 이런 것들만 추구하며 살 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의 물질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기본적인 의식주만 하더라도 돈이 있어야 갖출 수 있다. 친구를 만나더라도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위해 카페에 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공부를 하기 위하여 책을 사거나 강의를 듣는 것도 공짜는 없다. 인간인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에 돈을 추구하지 말고 자아 실현을 하라-는 말은 그냥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 치료를 받기 위해서도 돈은 필요하다.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돈으로 누릴 수 있는 것과 만족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백만장자가 된 적도 없으면서 그것 어떻게 아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실 그렇긴 하다. 어쩌면 신포도와 같은 말일 수 있다. 그래도 인간인 이상 유추를 하거나 타인의 경험으로 지혜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목표를 달성했을 때 그 기쁨이 계속 지속되지 않았던 경험으로 말미암아 원하는 수준의 금전을 취해도 분명 허무함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테이크도 가끔 먹어야 맛있지 매일 먹으면 질리는 법이니까. (난 스테이크를 좋아하진 않는다. 그냥 예시다.)
소유는 적절히 편하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사치가 아닌 이상 누릴 수 있고, 신상에 위험이 생겼을 때 해결할 수 있는 정도면 괜찮은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플 때 걱정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수준의 경제력은 갖추는 부분이다. 이는 욕심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안전의 욕구에 대한 대비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소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시간을 팔지 않고 나의 성장을 위해 쓸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소유다. 돈이 아까워서 다리가 아픔에도 먼 길을 오랜 시간을 걸려서 걸어가야 한다거나, 공부를 하고 싶지만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을 다닐 수 없다거나, 배우고 경험하고 싶은 것을 못한다거나 하지 않도록. 무소유로 인하여 무존재가 되는 위험은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기에 완전한 존재의 삶으로 가길 원치는 않는다.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먹지 않고, 자지 않고, 경험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없어서. 그래도 개인을 소외시키고 인간은 수치화 시키는 소유 모드는 줄이고 싶다. 사람들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경험으로 자신을 차별화 시키며 타인을 억누르기 위하여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공유하고 타인의 성장을 돕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분명 더 나은 세상은 존재 모드의 활성화일 것이다. 목표로 하는 모드가 있다면 존재 70%, 소유 30% 정도를 유지하는 삶이 아닐까. 어떠면 더 성숙해지고 지혜가 쌓인다면 존재 90%, 소유 10%로 비중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존재의 의미를 고민하는 것도 어느 정도의 소유가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는 말자. 어떤 사람들은 존재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도 없기 기본적인 소유를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들을 기만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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