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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나/365 나에게 접속

1일1주저리. 삼색 달개비

by 점점이녕 2024. 8. 9.

 

윤재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사무실 구석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그는 늘 자신의 업무에만 집중했다. 아침이면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고, 커피 한 잔을 내려 놓고,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동료들은 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도 굳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윤재는 그저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이었다.

 

혜원은 어느 날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지영님은 정말 해바라기 같아요. 항상 밝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잖아요. 해바라기가 태양을 따라 고개를 돌리듯이, 지영씨도 항상 주변을 환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혜원은 사람을 식물로 보는 독특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때로는 동료들을 식물에 비유하며 설명하곤 했다.

 

지영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해바라기라니, 그런 말 처음 들어봐요. 혜원님은 정말 감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네요."

 

혜원도 함께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현수님은 라벤더 같아요. 조용하지만 언제나 주변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향기같은 사람이잖아요. 특히 고양이를 좋아하는 걸 보면, 그런 섬세함이 더 잘 느껴져요."

 

현수는 약간 쑥쓰러워하며 "라벤더라니, 칭찬 고마워요."라고 답했다.

 

이 대화는 사무실 구석에서 조용히 일만 하고 있는 윤재의 귀에도 들렸다. 그러나 윤재는 대화에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이런 사적인 대화나 동료들 간의 친밀함이 불편했다. 그래서 그저 들리지 않는 척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일에만 몰두하려 했다.

 

혜원은 그런 윤재의 모습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앞으로 꼿꼿하게 유지한 채, 동료들의 대화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듯 했다. 혜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동료들과의 소소한 대화에 집중했다.

 

어느 날, 윤재의 책상 위에 작은 화분이 하나 놓여 있었다. 녹색과 은백색의 조화가 돋보이는 작은 이파리가 심겨 있는 연두색 화분이었다. 화분 앞에는 작은 메모가 종이에 적혀 붙어있었다. "삼색 달개비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면은 가지고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세요."

 

윤재는 삼색 달개비라는 식물을 처음 보았다. 작은 이파리들은 뿌리도 제대로 내리지 않은 것 같았고, 몇 장의 이파리가  휘청거리며 겨우 붙어 있는 상태였다. 윤재는 슬쩍 달개비의 잎을 만져보았다. 까만 흙 속에서 뿌리를 잃은 줄기가 툭 튀어나와 옆으로 스러졌다. 당환한 윤재는 연약한 줄기를 조심스레 들어 다시 흙 속으로 파묻으며, 더는 건드리지 않기로 다짐했다. 출근할 때마다 책상의 한 켠에서 자꾸만 눈길을 끄는 달개비와 메모를 보며, 윤재는 기계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었다. 햇빛이 책상에 방문하는 시간이 되면 왠지 모를 아쉬움에, 화분의 움직여 햇빛이 머문 곳으로 놓아주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윤재는 이 작은 식물에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루하루는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윤재는 여전히 묵묵히 일했고, 삼색 달개비는 천천히 자랐다. 매일 똑같은 모습처럼 보여서 혹시 죽은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시든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이파리의 수가 늘어나고 줄기가 길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며 자그마한 이파리들은 이제 화분의 가장자리를 넘어서며 자라났고, 뿌리도 단단히 내린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었던 이파리는 더 이상 세기 어려워졌다. 윤재는 더 큰 화분을 준비해 삼색 달개비의 일부 줄기를 잘라서 옮겨 심었다. 때로는 줄기가 부러지기도 하고, 이파리가 찢어지기도 했지만 , 그럴 때마다 윤재는 손상된 부분을 잘라내고 새로운 싹이 자라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윤재는 커피를 내리던 중 문득 자신을 떠올렸다.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그는 마치 삼색 달개비처럼 연약한 상태였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힘들었고, 큰 프로젝트가 있을 때면 압박감에 정신과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의 자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채 흔들리는 나날을 보냈다. 과묵한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도, 챙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도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와 작은 성과들 속에서 어느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삼색 달개비가 윤재에게 속삭이는 듯 했다. "우리는 천천히 자라나. 하지만 멈추지 않아. 언젠가는 네가 이룬 성장을 깨닫게 될 거야."

 

윤재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삼색 달개비를 바라보았다. 그 화분 속의 작은 식물이 이제는 그에게 자신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이 식물이, 결국에는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며 성장하는 과정이 윤재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주기적으로 물과 햇빛을 주었기에 느리지만 천천히 달개비가 자란 것처럼, 생각해보면 그가 회사에서 오래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도 알게 모르게 주변 동료들의 조심스런 배려가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이파리를 쓰다듬었다. 달개비는 더 이상 스러지지 않았다. 달개비의 잎을 만지작 거리던 윤재는 슬쩍 잎을 뒤집어 숨겨져 있던 보랏빛 반짝임이 충만한 색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혜원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윤재도 결국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리라는 것을. 삼색 달개비처럼 느리지만 확실하게 성장하는 그를 응원하는 마음에서 준 선물이었다.

 

윤재는 삼색 달개비가 자신에게 준 작은 교훈을 마음속에 새기며, 새로운 날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삼색 달개비는 여전히 그의 책상 위에서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평소라면 무심히 넘겼을 소리였지만, 그날은 유독 귀에 선명히 박혔다. 윤재는 그 소리에 이끌리듯 고개를 들었다. 눈길이 마주쳤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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