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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1주저리. 공허의 경계에 서서

점점이녕 2025. 9. 24. 00:07

# 최복동을 위하여

친한 동료와 점심을 먹으면서 무기력과 일의 고충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사가 급격히 커지면서 직원들도 많이 채용했고, 점차 세분화된 전문 직무가 생기고 있지만 오히려 조직 문화가 저해되는 것 같다는 이야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재미없고 억지로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 얼마나 일을 좋아하고 몰입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동료라서, 이 동료까지 이 상황에 처한 것이 정말 전사적인 문제인 것 같기도 했다.

 

지난 달의 타운홀에서 회사의 위기를 이야기하며 원격과 성과급이 사라진다는 이슈를 공표했다. 어떠한 복지와 프로세스가 변경된다면 이전에 문제가 존재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납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반발이 거셌다. 당연히 변경사항에 있어서는 장단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논지가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그 질의응답 과정에서 다소 처참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개인과 조직의 성장이 아니라 편의성, 심지어 그게 성장을 저해할 수 있는 방향의 편함에 초점이 맞추어 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최고의 복지는 동료. 그 말이 무색해지는 행태였다.

 

나도 일에 몰입을 하지 못한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다. 계속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시간을 보게 되는 것이 직장인으로서의 당연한 수순같으면서도, 그래도 난 그러면 안되지 않을까 하는 줄다리기 사이에서 이도저도 못하고 있다. 일의 의미와 동기부여를 이야기하는 팀원들에게 그것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다양한 도메인과 기술적인 경험도 쌓으며 회사와 함께 성장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환경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여전히 떠나지는 않았지만 왜 요즘은 스스로도 의심이 되는 걸까.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각자의 전문성에 대한 책임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이 분산되고, 결국에는 전가를 하게 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큰일났다.

 

몇 주전에 대표님이 리드 대상으로 타운홀을 진행하셨다. 대표님의 비전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차근하게 삶의 자취와 조직의 미래를 이야기해주는 것이 무언가를 시도하고 계시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여러모로 이 시간에서도 문제를 느꼈다. 일단은 개인적으로 문제 의식을 느꼈던 부분은 대표님의 퇴사 이야기였다. 과거에 한 회사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일하셨고, 그렇게 일하다보면 새벽 3시가 되곤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회사는 크게 성장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퇴근 시간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어서 그날부터 퇴사를 했다고 하셨다. 그렇게 새로운 조직을 만드셨다고. 나도 일에 빠져 살던 시기가 있었다. 꽤 길었고. 스트레스는 받았지만 재미도 있었고 중요하게 몰입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을 많이 보고있다. 혹시 나도...?

 

두 번째는 대표님의 비전에 대해서도 질의 응답을 가졌고, 그 시간에 오간 질문의 내용들이 씁쓸했다. 하나의 비전을 위해 함께 고민해주었으면 해서 채용한 위치에 있는 전문가 분들이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냐는 질문이 주를 이루었다. 기대감보다는 걱정과, 안될 것 같다는 인식이 팽배한 듯 했다. 물론 터무니없는 욕심은 눈 앞을 흐리고 실행을 무색하게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면 아예 가능성조차 버리는 것이 아닐까. 모호하다면 함께 구체화해 나가면 될 일이었지만, 위에서 구체화해서 가이드를 해달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패배주의에 휩싸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러는 한편, 나도 팀원들에게 어떤 가능성과 긍정을 부여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소수의 분들이다. 대다수 질문을 하지 않았던 분들은 긍정적이거나 그 방향성에 대해서 납득했고, 속으로는 어떻게 함께 성장할 수 있을지, 어떤 열정을 전파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을 수 있다. 내가 너무 편협한 사람이라 겉으로 드러난 것들에 대해서 너무 자극적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고. 분명 실행하고 공유하고, 슬랙으로 나누는 프로젝트들은 가치있는 것들이 분명히 많으니까. 야근과 주말 출근을 하면서 몰입을 하고 있는 직원분들도 많으니까. 이렇게 적고 보니 많은 분들이 몰입하고 좋은 동료로서 함께 해주고 있는데 작은 분란을 일반화해서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다. 동료들에게 너무 큰 실례인 것 같기도 하다.

 

문제만 느낀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카페에서 돌아오는 길에 결론은 그래도 긍정적이었다. 일의 철학을 잃어버린 것 같으니 철학과 비전을 다시 그려봐야겠다고. 스스로 올곧게 서야 주변에도 좋은 영향력을 전파할 수 있으니까. 대표님 말마따나 회사를 위해서 헌신할 필요는 없고, 개인의 성장과 회사의 성장의 방향성을 일치시키는 방향으로 가면 좋으니까. 최고의 동료와 함께 좋은 프로덕트로 성공 경험을 쌓고, 그 역량을 내재화하여 만약 현재의 환경이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더 나은 곳으로 이직하라는 그 당당함이 좋다.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를 느끼고 더 나아지기 위해서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이 느껴져서 좋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도 그만할 때가 아닐까. 그래서 아직은 괜찮다. 내가 해보지 않는 것들이 있으니까. 

 

 

 

# 공허한 경계

<천 개의 파랑>에서 마음을 휘젓는 문장을 발견했다. 소설 속의 구절은 아니고 심사평에 있던 내용이었다.

SF를 피상적으로 이해한 탓일 수도 있고, 문학 자체를 상투적으로 학습한 때문일 수도 있다. 그 결과는 행동도 사유도 하지 않는 주인공, 미려하지만 공허한 문장, 결말 없는 이야기로 나타났다.

 

<천 개의 파랑>이라는 소설에 대한 평가는 아니었고 응모작들에 대해서 총평을 하면서 김창규 소설가님이 남긴 평론중 일부다. '미려하지만 공허한 문장'. 요즘 감각을 늘리고 다양한 경험을 느끼고 싶다는 목적을 가지고 기록도 다시 하고 있고 표현과 어휘를 늘리려고 했는데, 내 경험과 기록에도 공허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기록을 위한 기록, 경험을 위한 경험. 그 안에 과연 '내'가 있었던 것이 맞을지. 글자를 채워야 한다는 강박, 새로운 어휘를 쓰면서 표현력을 늘려야겠다는 다짐. 그 결과 이해하지 못할 단어들을 나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다. 내가 정말 황홀했고, 찬탄했고, 유려했었나.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표현으로 감각을 오히려 흐린 것은 아닐까.

 

그 표현을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단어가 주는 감각을 제대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그렇지 않으면 앞에 놓인 쓰레기를 보고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상한 건 이상한 것이다. 또 한동안 글도 못 쓰고 말도 못할 수도 있겠다... 좋은 게 좋다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불편한 자극을 심어주는 것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미움받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을까. 하지만 위와 같은 평을 남겨준다는 것은 스스로 문제를 돌아보고 더 생명력과 흡인력 있는 내러티브와 인물들을 탄생시켜보라는 애정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무조건적 비난이 아니라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자극을 주는 존재와 경험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