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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나/365 나에게 접속

1일1주저리. 감각 사랑하기

by 점점이녕 2025. 2. 6.
우리가 지혜롭다면, 영원한 여행자임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비가 오는 날에 비가 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 젊어서는 젊은의 열정을 사랑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평온에 이르렀음을 사랑하는 사람. 내 곁의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일상을 사랑하고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 우리는 지혜로워야 한다. 이렇게 다짐해야 한다. 나에게 남은 삶에 나는 주어진 것을 사랑하리라. 내가 뛰어든 세상을 사랑하리라. 그렇게 인생을 사랑하리라.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무한> 중

 

 

각 존재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서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하며 산다. 같은 환경에서도 누군가는 천국, 누군가는 지옥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지만 사랑의 단계는 여전히 장벽이 있는 듯하다. 보통 질적인 사랑이라고 한다면 무조건적인 사랑이 떠오른다.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자식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해줄 수 있는 것. 그리고 항상 어떠한 존재가 뒷받침 되는 것 같다. 가족, 친구, 연인, 반려동물 등 생명을 가진 대상이어야 사랑이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생명이 중요한 이유는 감정적인 교류가 중요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 감정적 교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고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받아주는 대상과 나에게 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에 조건적인 사랑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일상을 사랑하고, 여행을 사랑하고, 젊음을 사랑하고,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언어로는 좋은 것이라 이해해도 여전히 잡히지 않는 뜬구름적인 감정과 태도처럼 느껴진다. 나름 의미 있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정말 삶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일상을 사랑하며 나아가려면 어떤 태도는 지니면 좋을까.

 

사랑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할까. 보통 사랑을 관계 속에서 정의하지만 사실 사랑이란 반드시 대상과 교루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삶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때 그 사랑이 뜬구름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 없이 개념적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구체적인 경험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가령,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의 기분, 청명한 하늘과 푸른 자연 속을 거닐 때의 상쾌함,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평온함. 이런 순간들이 쌓이면 삶이 아름답고 다채롭다고 느낄 수 있고, 그 경험을 온몸으로 느낄 때 삶을 사랑한다고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경험으로서의 사랑

현상학적 관점에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 자체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사랑은 특정한 순간의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존재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과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삶을 경험할 수 있을까.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은 새로운 환경과 미지의 경험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반면,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익숙한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도 깊이를 느낀다. 두 경우 모두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지만, 하나는 낯섦 속에서, 다른 하나는 친숙함 속에서 그 가치를 찾는 것이다. 결국 삶을 사랑하는 경험이란 특정한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요즘은 새로운 장소를 여행하는 것을 다채롭게 살아가는 방식으로 여겨지는 것 같고, 일상을 반복하는 삶은 지루하고 재미 없는 삶처럼 여겨지는 것 같다. 장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문제 의식을 느꼈을 때 삶을 너무 이분법으로 바라보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나는 충분히 일상과 사소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일 수 있는데 그 가치를 무시하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남의 떡을 훔쳐보지 말도록 하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우리의 경험이 단순한 인지적 과정이 아니라 몸을 통해 세계와 관계 맺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기존 철학에서는 정신과 신체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메를로퐁티는 몸이 곧 사고하는 주체라고 보았다. 몸은 단순한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경험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시각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촉각, 움직임, 공간감각을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살아간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특정한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람의 말투, 향기, 움직임 같은 것들이 모두 사랑의 경험을 형성할 수 있다.

 

삶을 사랑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삶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관념적인 사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경험하는 모든 순간에서 드러난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몸을 말아 느끼는 포근함, 밤하늘 아래에서 귀를 기울일 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 등산길에서 한 걸음씩 오르며 숨이 가빠지지만 몸이 단단해지는 느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국물을 한입 머금었을 때의 깊은 온기, 모르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받게 되는 친절한 말 한마디. 이처럼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몸으로 경험하고 감각하는 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것일 수 있다. 삶의 아름다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순간을 경험하느냐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감정과 태도
현상학적 관점에서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감정은 순간적으로 변하지만, 사랑을 삶을 대하는 방식으로 본다면 그것은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태도가 된다. 그렇다면 피곤하고 지칠 때도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만약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라면 삶이 힘들도 지칠 때 삶을 사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삶을 대하는 태도라면,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불완전한 순간들 속에서도 살아 있음을 긍정할 수 있다.

 

태도는 결국 선택의 문제다. 후설이 강조한 '의식의 지향성' 개념처럼 우리의 의식은 단순히 감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의미를 구성한다. 삶을 사랑하는 경험은 특정한 조건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경험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다. 삶을 사랑하기 위해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의 작은 감각들 속에서도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 말로 우리가 삶을 대하는 방식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현상학적 물음이 될 것이며, 삶에의 사랑에 조금 다가갈 수 있는 발자취가 될 것 같다.

 

 

의식의 지향성
모든 의식은 항상 어떤 대상을 향해 있다는 개념으로, 에드믄투 후설이 정립한 현상학의 핵심 개념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그냥 '의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무언가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단순히 '생각한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이지, 내용 없이 순수한 생각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각도 지향성을 가진다. '나는 빨간색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빨간색'이라는 대상을 지각하고 있는 것이며 '나는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언제나 특정 소리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감각조차도 항상 어떤 대상을 향해 있으며, 단순한 신경 작용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의식의 지향성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 의미를 구성한다는 점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같은 비를 보고도 어떤 사랑은 우중충한 날씨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낭만적인 분위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같은 음악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슬픔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평온함을 느낀다.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은 단순한 감각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대상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형성된다.

지금까지 비오는 날을 싫어했다. 우중충하고 흐린 하늘,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 질척한 느낌, 달라 붙는 옷. 생각해보면 비가 와서 우울하다는 것은 의식이 비를 불쾌하게 지향한다는 것이며, 비가 오면 분위기가 있다는 것은 비를 감성적인 것으로 지향하는 것이다. 똑같은 하루여도 누군가의 하루는 우울하고, 누군가의 하루는 감성적인 분위기가 있는 이유가 이러한 지향에 달려있다. 분명 같은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달라질 것이다. 하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경험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들이 쌓이는 삶의 과정에 대해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면 충분히 삶을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피곤해서 그냥 잘까 고민했지만, 삶과 사랑에 대한 고민을 해볼 수 있는 지금의 시간과 머리, 생각을 글로 정리해보며 스스로도 이해해 볼 수 있는 글자가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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