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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나/365 나에게 접속

1일1주저리. 주저하는 찬탄을 위하여

by 점점이녕 2025. 2. 8.
나는 오래도록 방치하면 존재가 말라붙게 될 두 가지 갈증을 해소했다. 두 가지 갈증이란 바로 사랑하는 것과 찬탄하는 것.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그저 불운일 뿐이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행이기 때문이다.

<결혼, 여름> 중

 

 

습관적으로 해야할 것들을 나열하고, 계획을 세우다가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생활의 구체적인 방향으로 인하여 머리가 복잡해졌다. 같은 카테고리로 묶고, 중요도를 나열하고, 예전에 적어보았던 투두리스트까지 살펴보면서 여전히 유효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지만 난잡함은 가중될 뿐이었다. 해야할 것들은 많고 시간은 적고. 분명 예전에도 너무 많은 것들을 달성하려 하다가 실패한 후에 조금 내려놓는 연습을 하자고 다짐했음에도 또다시 한바가지 바리바리 싸고 있는 상황에 내적 웃음만 나왔다. 나란 인간.. 욕심쟁이.. 그렇다고 지우고 싶은 것들은 없었다. 다 중요한 것 같은데. 

 

머리를 싸매다가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실마리가 풀렸다. 하고 싶고, 해야 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삶을 찬탄하고 사랑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하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본질을 찾은 느낌이었다. 정보를 습득하고, 많은 경험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개인적인 삶이나 일 모두를 잡고 싶은 것. 사실을 삶을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랑과 찬탄이라는 표현은 너무나 거창해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였는데, 삶을 사랑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태도를 갖추게 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무언가를 갖추고 싶다는 것은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에 지금의 아쉬움은 있지만 어쩌면 그런 부족으로 인해서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준비는 어느 정도 된 것 같다.

 

찬탄과 성장

'찬탄'이라는 느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것 같다. 예술 작품 앞에서, 거대한 자연을 마주했을 때, 혹은 타인의 탁월함을 볼 때 찬탄을 경험한다고 한다. 하지만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 내 삶에서는 거리가 먼 감정임이 분명하다. 단순하게 '좋고', '나쁨'으로만 받아들였던 그 많은 것들 중에서도 찬탄할 만한 것이 분명 있지 않았을까. 내가 미숙하기에 놓쳤던 것들이 아쉬운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는 더 많은 표현력과 어휘력을 길러서 더 다채로운 느낌을 접해보고 싶다.

 

쇼펜하우어는 미적 체험을 통해 인간이 일상의 고통에서 벗어나 순수한 직관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찬탄할 때, 그것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확장되는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가령, 깊이 있는 예술 작품을 접하거나 경이로운 자연 풍경을 바라볼 때, 순간적으로 현실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차원의 사유로 나아가게 된다. 시간의 흐름을 잊거나 감정이 고양되는 그런 순간과 경험.

 

뿐만 아니라 찬탄은 배움과 성장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 삶'에서 볼 수 있듯이 무언가를 찬탄하는 행위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찬탄의 감정이 단순한 감탄에 머물지 않고 삶의 에너지가 되는 것은, 그것이 곧 동경과 실천의 방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예술가, 혁신적인 사상가, 혹은 깊은 통찰을 지닌 인물을 찬탄할 때 그들의 태도와 정신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간디의 비폭력 정신을 찬탄하는 사람은 보다 평화적인 태도로 타인을 대하려 노력할 것이고, 마리 퀴리의 끊임없는 탐구 정신을 찬탄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구와 학문에 대한 태도를 재정비할 것이다.

 

결국 찬탄은 단순한 감상의 영역을 넘어, 인간 정신의 성장을 이끄는 강력한 동력이다. 무엇을 찬탄하는가에 따라 내면과 사고방식이 달라지고 나아가 삶의 방식이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찬탄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닿고자 하는 세계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나에게 찬탄은 앞선 문장이며, 카뮈의 삶인 것 같다. 카뮈의 에세이를 보고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며 일상을 가치있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고 싶다고 생각했으며, 찬탄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더 느껴야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에.

 

그동안 단어를 너무 글자의 조합으로 받아들여 느끼지 못했을 뿐, 살아오면서 수많은 영향력을 준 것들이 사실은 모두 찬탄할 것들이 아니었을까. 

 

만약 찬탄하는 능력을 잃는다면 냉소주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클 것이다. 냉소적인 태도는 아무것도 경이롭게 여기지 않는 태도와 직결된다. 이는 세계를 무의미한 것으로 바라보게 만들며, 결국 삶의 가치와 의미를 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지금까지는 감정의 기복이 큰 것이 미숙하다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감정을 죽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좋아도 티내지 않고, 싫어해고 애써 괜찮다고 합리화하고. 상처받거나 실망하지 않는 데에는 좋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대신 냉소를 얻었다. 많은 것들에 대해서 돈낭비라고 생각하게 된 것. 표면적으로 보자면 돈을 아끼는 태도로 보일 수 있겠으나, 사실은 모든 것을 돈으로 바라보는 물질적이고 무미건조한 태도가 아니었을까.

 

앞으로는 감성을 더 강화할 때인 것 같다. 많은 것들에 대해서 사랑과 찬탄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것. 사실은 어떠한 목표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찬탄을 느끼게 해주는 수많은 것들에 찬탄의 인사를 보내고 싶은 시간이다. 

 

 

사랑과 자유

보통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을 불행하다고 여기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의 불행함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사랑은 종종 책임, 헌신,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랑을 내려놓으면 더 가벼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유로운 삶을 보장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싫어서 피하고 싶었지만, 사람과 감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접하는 시간을 늘려보니 감정을 죽이고 관계를 죽이는 것이, 나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 꼭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사랑하지 않는 삶은 겉보기에는 홀가분할 수 있다. 아무것도 책임질 것도 없고, 헌신할 필요도, 희생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내 한 몸 건사하고 잘 먹고 잘 사면 좋은 삶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본다면 의미 없는 자유를 초래할 가능성도 크다. 편하게 살면 좋겠지만, 먹여주는 대로 먹고, 입혀주는 대로 입고, 재워주는 대로 자면서 평생을 사는 것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이 될 수 있을까. 인형처럼 살기보다 조금은 삐그덕대도 내 몸으로 움직이고 조금 다치면서 아픔도 느껴보며 사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세상을 무시하고 나만 생각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의 틀에서 지킬 것은 지키고, 느낄 것은 느끼면서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관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동시에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인 경험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단순히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자유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소극적 자유의 형태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이는 관계와 감정을 포기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현재 사랑이 없다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거나 무감각해지는 경우가 많고, 사랑을 포기한 것은 사랑의 상실을 겪은 뒤 다시 사랑할 용기를 잃어버린 상태. 후자는 기회가 있다면 다시 감정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지만, 전자는 점점 감정 자체가 무뎌지면서 삶의 깊이를 잃어버릴 위험이 크다. 그리고 난 전자였던 것 같다.

 

나를 성장시키고, 다른 대상을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세상도 능동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감정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삶에서 사랑하는 것들을 많이 만들고, 실제로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카뮈처럼 입생트 풀이 사각거리는 소리, 눈부신 햇빛, 순간적이면서도 영원한 바다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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