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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디지몬

점점이녕 2025. 9. 17.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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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디지몬 - 예스24

길고도 매우 짧았던 유년 시절에 건네는 작별, 천선란 세계의 시작“찾아라 비밀의 열쇠, 미로같이 얽힌 모험들!” 세기말의 혼란이 막 잠잠해지려던 2000년, 신나는 가사의 오프닝 송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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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붙잡을 결심

 

아무튼, 디지몬. 삶에서 스쳐가는 감각들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기로 한다. 감격과 감동, 번민과 고뇌, 순간의 떨림들. 이 모든 것을 기록해두시 않으면 금세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흩어질 것이다. 잘 기억나지 않더라도, 두서없더라도 조금은 붙잡아보는 것이 어떨까.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내 시간을 빛나게 하는 작은 조각들이 아닐까.

 

작가의 감각이 부럽다. 나도 디지몬을 보고 자란 세대지만, 나에게 디지몬은 단순히 재미있는 만화에 불과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작가는 그 시계를 자신의 삶과 고통을, 위로와 안녕을 비추어내는 거울로 삼았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어떤 이는 세계의 구조를 발견하고, 또 다른 이는 장난처럼 소비한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마음의 준비, 혹은 삶을 바라보는 각도. 얼마나 많은 면이 맞닿아 있을지 나로서는 가늠할 수도 없겠다.

 

심형탁이 어릴적 도라에몽에게서 위로 받고 친구로 여겼던 것처럼, 천선란 작가님에게는 디지몬이 그러했다. 성인이 되어서 디지몬 세계와 잘 헤어졌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작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 세계에 언제나 은밀하게 살아남아, 삶을 지탱하는 또 다른 층위로 작동할테니까. 그리고 작가님의 해설도 나의 또다른 층위가 될 것 같다.

 

 

디지털 세상, 따스한 시선

 

디지몬이 디지털 세상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곳에서 바이러스와 백신은 단순한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 따뜻한 이해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검은 톱니바퀴조차 단죄의 대상이 아니라 안타까움이 대상이 된다. 존재를 가리지 않고 가닿는 이 부드러운 시선은 어둠 조차 밝혀주는 듯하다.

 

디지몬이 문제를 해결한 뒤 힘이 다해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어머니가 자신을 살게 하고, 힘을 다하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셨다는 작가의 말과 맞닿아 있다. 노쇠가 단절이 아니라 회귀일 수 있다는 사유, 삶에 대한 시선을 근본부터 바꾸는 것 같다. 나의 디지몬이 된 어머니.

 

아버지의 따스한 시선은 또 다른 지혜를 전하는 것 같다. 어머니가 아프지 않닸더라면-을 반복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지금의 삶이 최선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흔히 선택하지 않은 길이 더 나았을 것이라 상상하지만, 그것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삶은 매 순간 선택의 길에서 내린 나의 최선의 결정들이 쌓여 이루어졌다. 그동안 없는 것을 붙잡기 위해서 바닥에 놓인 화살을 스스로 들어서 가슴에 꽂은 것은 아닐까. 내가 가진 것, 이미 누리고 있는 것, 그것들을 눈을 감고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물론 지금은 화살을 뺐다.

 

 

나의 문장은?

 

아이들은 저마다의 문장을 지니고 있다.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문장, 도저히 내 안에 찾을 수 없는 문장. 그러나 결국 발견한 문장. 나에게는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소라의 말이 마음에 꽂힌다. 내 문장은 무엇일까. 얼마 전에 키워드를 생각해보기는 했는데. 지속가능성, 성장, 감각. 갑자기 떠오른 ‘불굴’.

 

나는 너무 무디고 무감각한 것 같아서 한탄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얼마전 한 분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탁월한 것 같다고, 그게 나의 재능인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사람을 마주하고 대화 속에서 상대의 관심사를 알아채는 능력이 좋다고. 그저 눈치밥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사람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고, 인류애가 포함된 시선일 수도 있겠다. 나는 무감각하지 않았다. 나에게도 문장이 있는 것 같다. 없으면 내가 만들어야지.

 

 

연민과 오만

 

작가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돌보는 것을 고백할 때 연민의 시선을 받는 것이 껄끄러웠다고 고백한다. 인간에게 측은지심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삶을 위계화하는 것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상대의 노력을 평가하는 순간, 그건 무례가 되는 것 같다. 땀 흘려 일하는 것과 땀 흘려 운동하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전자를 안타깝게 여기고, 후자를 칭찬한다. 이건 부조리다.

 

열심히 생각하고 실행해도 결과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적이 있지만 이것도 오만과 편견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것들도 나의 노력이라고 생각했지만 8할은 운이다. 운이 좋았던 것을 실력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그렇다고 노력하지 말고 운명에 맡기자는 말은 아니지만, 상황과 맥락을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재단하지 말자는 의미다. 정신적 게으름과 오만은 연민이라는 가면을 쓰고 스며들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쉽게 타인을 위계화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유의하자.

 

 

나의 디지몬은?

 

나에게 디지몬과 같은 존재나 대상은 무엇일까. 나를 살게 하는 것, 지금의 나를 만든 것.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의 성실함,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정직함, 불편함을 버텨낸 기억들, 좁디 좁은 차에서 버텨낸 13시간, 5년간 하루 네 시간에 걸쳐서 통학을 한 것, 9년 동안 세 시간 넘게 통근한 것, 이 모든 시간들은 고통이 아니라 나를 단단하게 길러낸 자양분이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업무를 하고, 사색도 하고. 오랫동안 서서다니면서 단련된 다리, 노트북을 메고 몇 시간을 걸어도 괜찮은 육체, 자연스럽게 생긴 코어. 끈기. 보고배운 것, 물려받은 것.

 

사회성이 부족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공부도 병행하며 동호회 활동도 했고, 전공을 버리고 디자인 학원을 다닌 것, 낯선 사람과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모임을 시작해본 것, 혼자 여행을 떠나본 것. 막상 해보기 별 것도 아니었던 것들. 오히려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순간들. 무엇이라고 딱 하나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많은 것들이 결국 나를 만들었으니.

 

 

문장

결국은 글자인 것 같기도. 한글이라는 문장, 언어의 구조.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이자, 나 자신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 나를 표현하게 하고, 교류하게 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을 확장시켜주는 것.

 

따라서 앞으로 더 많은 감각과 표현을 확장시켜야 한다. 감각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어휘와 표현이 필요하다. 어휘는 감각의 촉수이고, 표현은 그것을 세계에 드러내는 방식일 것이다. 천선란 작가님이 디지몬 세계에서 길어 올린 세계처럼, 나도 내 삶 속에서 쉽게 사라지는 결들을 붙잡아야겠다. 바라보고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나에게 와닿을 것 같다.

 

 


내게 처음으로 세상을 향한 커다란 질문과 존재의 무의미함이, 명명할 수 없는 거대한 공허와 우울의 덩어리로 다가온 때이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아주 작은 저수지에 있는 모양이라고, 저 올챙이들처럼. 이 세계 밖에 다른 세상이 있는 거라고. 나는 거기서 왔기 때문에 여기가 답답한 거라고.

자유란 모든 것을 팽개치고 내 마음대로 사는 방종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과 규범에 대한 책임을 어느 정도 감당하면서도, 그 굴레 안에서 자신만의 노력을 이어가는 과정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렇기에 지금의 고민은 나약한 불안이 아니라 건강한 성찰이며, 책임 있는 걱정이다.

그 길 위에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기쁨과 연민을 함께 나누며 이 삶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자유는 내맘대로 사는 것은 아니니까. ‘야너두?’

 

‘유치하다’. 사람들이 대체 어떤 대상에 이 말을 쓰는지 한참 고민한 시기가 있었다. ‘유치하다’는 단어는 감상을 너무나 단편적으로 설명하고 작품을 납작하게 눌러버린다. (…) ‘유치하다’는 단어 자체는 ‘수준이 낮거나 성숙하지 않음’을 뜻한다. 작품이 성숙하지 않다는 뜻으로 유치하다고 평가하는 걸까? 그렇다면 세상에 성숙한 작품들이 있다는 것인데, 나는 성숙한 작품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작품은 시대에 따라, 읽는 이에 따라, 해석에 따라 천차만별로 평가되니까.

유치한 작품이 아니라 유치한 자기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인생을 바꿀 캐릭터, 문장 하나를 만날 수 있으니까. 무엇을 접하든 배우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세상은 온통 스승으로 가득할 것이다.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그렇다. 이것이 바로 신비한 세계로 끌려들어 온 일곱 명의 아이들이 앞으로 겪게 될, 길고도 매우 짧은 여름방학의 시작이었다.

나도 여행중

 

여러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어도 함께 있다는 감각이 들지 않았다. 마치 다른 차원에 갇힌 듯, 누구에게도 내 목소리가 닿지 않을 것 같았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몰라서 외로움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 증상도 또렷이 인식하지 못한 채 참고 견뎠다. (…)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아무래도 지구에, 이 차원에 잘못 태어난 것 같다고. 빨리 탈출해야 할 것 같다고.

 

스스로를 이렇게 말하는 게 부끄럽지만, 나는 고독을 타고난 아이였다(나는 사람마다 특정 감각을 안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수학적 감각, 음악적 감각 등의 재능뿐만 아니라 예민한 것도, 깔끔한 것도, 몰입을 잘하는 것도 전부 가지고 태어난 감각의 영역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의 고독은 사건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태어난 기질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피고키몬이 안쓰럽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피노키몬에게서 매번 꿈에 나와 나를 괴롭히던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까. 할수만 있다면, 피노키몬과 친구가 되어 끝장나게 놀아주고 싶다. 그럼 피노키몬에게도 다시 진화할 기회가 올 텐데. 내가 경험해봐서 아는데.